에세이
화자가 공지영 본인인지는 알 수 없다. 그녀는 사람들이 붐비는 지하철 속에서 어릴적 놀아주던 봉순이 언니를 발견하고 만다. 당신이 울면 모든 걸 제치고 달려와서 안아주던 봉순이 언니. 누구보다 온정 깊었으나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봉순이 언니. 언니는 지하철 구석에서 자신의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먹이고 있었다. 이젠 너무 어른이 되어버린 그녀는 언니와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끔찍한 희망이라고 말했다.
그녀가 봉순이 언니를 끝내 모른척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오래 전에 읽은 탓이다. 그녀는 언니를 닮은 아이들의 삶이 언니처럼 불행의 연속일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아이들 자체가 모종의 불행으로 태어난 결과물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봉순이 언니는 이때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불행이 불행인 줄도 모르고 방긋 웃기만 할 것이었다. 그 모든 불행들을 어느 누구도 대신 막아줄 수는 없으므로. 그러니까 아마도 그녀는 언니를 모른척했을 것이다.
내 어머니도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다. 엄마는 국민학교도 나오질 못했고 아직까지 자기 이름 석자도 재대로 쓰질 못하신다. 동네 어른들 말씀으로는 엄마는 산에 나물을 캐먹으면서 살던 아이였다고 한다. 못 먹고 크셔서 그런지 우리 엄마는 사나흘 마늘을 까서 번 돈 만오천원을 손에 쥘 때마다 식구들 몰래 어린 나와 누나를 데리고 가서 군것질을 시켰다. 엄마에게는 간간히 우리한테 순대 떡볶이를 사먹이는 것이 의무인 것 같았다.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집으로 가는 만원버스안에서 쪼그려앉아 피자빵을 억지로 먹게했던 엄마가 나는 죽도록 창피했었다.
엄마는 너무도 투명해서 웃는 사람에겐 웃음으로 답하고 화를 내는 사람에겐 화로 답했다. 화를 내는 사람에게는 결코 웃음으로 답할 수가 없어서, 그리고 나는 엄마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미워할 용기가 없어서. 나를 포함해 결국엔 모든 사람들이 엄마를 미워했다. 장애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자라면서 많은 불행들을 마주했다. 엄마가 따귀를 맞는 것도 보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비웃음 사는 것도 보았다. 엄마가 정신나간 소처럼 벽에 머리를 박는 모습도 보았다. 글로써는 차마 말할 수도 없는, 나는 구급차와 경찰차가 전혀 낮설지가 않다. 아버지가 자살했을 땐 불행이 하나 줄어서 다행이라는 생각 뿐이었다. 견뎌낼 수 없는 불행들이 닥칠때마다 나는 공지영의 끔찍한 희망을 곱씹었다.
끔찍한 희망이라니. 이토록 텅 비어있는 말이 있을까.
지금은 행복하냐고 물어본다면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앞으로 행복해질 수 있겠냐고 물어본다면 그것도 자신있게 대답할 수가 없다. 원체 행복과는 거리가 있는 삶이었고 아마도 우리 식구는 죽음마저도 초라함을 벗어나지 못할듯 싶다.
요즘 예기치못한 각종 사건 사고 뉴스들을 보다보면 나는 내가 요절하는 상상을 한다. 심장마비나 교통사고. 알수없는 사고들로 인해서 유서도 유언도 없이 픽 죽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럴때는 남겨질 엄마와 누나 걱정보다 내 삶은 과연 가치가 있었는가 하는 이기적인 자문만 떠오른다. 교통사고를 당해서. 빌딩 창문을 닦다 추락해서. 제빵 기계에 몸이 끼어서. 어느 순간 픽 쓰러지고 마는 삶에 과연 어떤 가치가 있을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글쎄. 캄캄한 어둠속에 잠겨죽어도 불행의 시간선 어딘가에 분명 햇볕 한 줌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어느 날, 무슨 이유인지 엄마와 어린 내가 울다 지쳐있었던 유난히 화창한 날이 있었다. 그 날은 굳게 닫혀있었던 우리집 대문이 큰소리로 삐걱였고 어떤 여자가 과자를 한아름 싸들고 찾아왔다. 그녀는 함께 마루에 걸터앉아서 엄마의 손을 잡고 용서를 빌었다. 옛날엔 너무 어려서 그랬다고.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로써는 알수 없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고 엄마는 그런 그녀를 불편해했다. 그녀는 엄마의 울퉁불퉁한 손을 어루만지다 저녁 어스름쯤 돌아갔다. 그녀가 가고 나자 엄마는 방긋방긋 웃기 시작했다. 엄마는 우리들에게 초코파이를 뜯어주면서 아까 본 그녀가 엄마의 절친한 친구였다고 자랑을 했다. 논을 메고 온 아버지가 돌아오자 엄마는 아버지에게도 자신의 친구가 왔다갔노라며 자랑을 했다. 마실다녀오신 할머니에게도 친구자랑을 했다. 나는 여태껏 그때만큼 신이 난 엄마를 본 적이 없다. 그 날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엄마의 친구를 본 날이었다.
햇볕은 굳이 우리 삶의 클라이막스를 비추지 않아도 된다. 우리의 삶 어딘가. 눈 앞이 캄캄해졌을 때 기억하고 되짚어갈 곳만 있으면 된다.
엄마는 요새 자주 방긋방긋 웃는다. 이제 우리 식구는 만나면 고기도 자주 먹고 극장으로 영화도 보러간다. 맨밥에 고추장만 비벼먹고 살던때보다야 훨씬 잘 살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본다면 과연 이게 행복인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행복이 행복인줄 모르고 불행이 불행인줄 모른다. 낮엔 해가 뜨고 밤엔 달이 뜨니까. 하루 하루 그냥 저냥 산다.
이제 막 환갑이 된 엄마는 여기저기 잔병치레를 했다. 무릎도 않좋으시고 치아도 몇개 때웠다. 나는 엄마걱정보단 솔직히 돈걱정부터 앞섰다. 재작년엔 부정맥 수술까지 받으셔서 3개월마다 내가 있는 파주까지 와서 심장약을 타가신다. 이 약은 평생을 먹어야 한다는데 엄마는 3개월마다 아들을 볼 수 있어서 오히려 좋아했다.
새아버지께 엄마의 도착시간을 알려드리고 용산역까지 데려다드리면 헤어질 시간이다. 엄마는 사람이 많은 곳을 무서워해서 용산역에 올 때면 늘 움츠러드신다. 그러면서도 꼭 배고프면 빵 같은 걸 사먹으라고 오천원쯤 쥐어주시며 기찻길에 오르신다. 지금은 내가 키 180에 85키로 거구가 되었음에도 엄마는 아직까지 운동회때 영양실조로 쓰러졌던 어린 아들을 잊지 못하시는 듯 하다.
엄마를 배웅하고 혼자남은 나는 다시 파주로 돌아가는 경의중앙선 지하철을 탄다. 늦은 오후나 저녁 때쯤이다. 지하철이 아무리 빠르게 달려도 차창으로 들어오는 노을빛은 시간이 멈춘듯 반듯하다. 그때 내 손에는 오천원으로 산 빵이나 사이다같은게 들려있을 것이다. 빵을 입 안에 우겨넣고 우물거리고 있으면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 눈총어린 시선들쯤 어딘가에 나를 애달프게 바라보는 그녀가 있을 수도 있다.
나는 그 시선이 장애가 사라진 엄마 본래의 영혼처럼 느껴진다.
그런 상상을 하면 울컥해진다.
끔찍한 희망.
봉순이 언니의 아들이었던 나는 맞은 편의 그녀에게 가서 악수를 청하고 싶다. 사니까 그냥 살아지더라고. 그러니까 하나도 미안해할 필요 없다고. 그렇게 웃으면서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