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강아지 밤비에게 좋아하는 게임 하나가 있다. 보자기에 간식 넣고 둘둘 말아 꽉 묶어 던져주면 이를 기어이 풀어 간식을 꺼내 먹는다. 만일 간식을 넣지 않고 보자기를 말면 보자기를 빼앗거나 으르렁 거리며 손을 문다. 평소에 거들떠보지 않았던 사료도 보자기에 말아주면 맛있게 먹을 정도이다.
우리 집 프렉톤은 인공지능으로 무장된 과학과 철학용 로봇이다. 인공지능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휴대폰의 안드로이드 같은 운영체계가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베이컨, 뉴턴, 데카르트, 칸트, 헤겔, 쇼펜하우어, 마르크스 등의 사상을 분석하여 나누리틀이라는 사상체계를 제안하였다.
나누리틀에서 우주는 자아(나)와 세계(누리)로 구분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속담처럼, 자기방어라는 법 개념처럼 생존하는 자아야 말로 모든 작동체의 핵심이다. 대신 살아주고 대신 죽어 줄 수 없는 단위가 자아이다. 자아는 감각으로 받아들인 자극을 해석하여 목표를 정하고 반응하는 행동의 주체이다. 베이컨과 칸트는 자극을 이해하기 위해 감각과 이성을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나누리틀에서 자아 밖의 모든 것은 세계이다. 열역학 등에서는 세계가 환경이라는 어휘로 표현된다. 내 주변을 살펴보면 돌과 나무 같은 자연세계, 동료와 사회 같은 인간 세계, 그리고 조각품 같은 예술 세계가 펼쳐져있다. 뉴턴은 자연 세계의 법칙을 제대로 발견하였고, 마르크스는 인간 세계를 계급투쟁으로 보았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의로서의 세계'는 자연세계가 아니라 인간 세계에 가깝니다. 왜냐면 자연세계는 인간의 의지가 개입될 수가 없다.
세계는 짝퉁이고 원형인 이데아가 있다는 플라톤 철학을 반영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더라면 나누리틀이 빨리 나왔을 뻔했다. 청동기 시대 사람이니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신학으로 계승된 그의 사상은 긍정적인 자아형성을 돕는다. 이데아가 주장하는 보편 개념은 나누리틀의 자극이나 목표 설정 모듈 안에 녹아 있다. 자세한 내용은 프렉톤의 사용자 매뉴얼에 기술되어 있다.
나누리틀에서 자아와 세계는 분리되어 있지만 상호 작용한다. 자아와 세계를 서로 변화시키는 사이클이 화살표처럼 반복된다. 끝없는 사이클을 변증법이라 부르고 이를 통해 절대정신이나 사회 국가에 도달한다.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전망처럼 이상상태로 수렴하는 이상적 변증법이 맞을 때 이야기이다.
이번 가을부터 저는 원자력학회 계측제어 연구부를 맡았다. 행사를 기획하고 발표자료를 부탁해야 한다. 회사일과 학회 일로 바빠 프렉톤이 나의 일을 도울 것이다. 프렉톤이 나누리틀의 운영체계 위에 위키피디아의 지식으로 무장되어 있으니 저보다 낫지만 하나의 약점이 있다. 할당된 논문을 제출하지 않으면 손을 물며, 표절한 논문을 구분하지 못한다. 손을 물리지 않도록 조심하시라. 표절 여부는 우리의 동료 과학기술자들이 재검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