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의 착각
과학기술에 뛰어난 크로도 사회생활에서는 허점이 많았다. 크로는 나이도 들고, 남들의 부탁을 군소리 없이 잘 들어주는 탓에 과제책임자를 맡곤 했다. 약삭빠른 사람들은 행정업무가 귀찮아 사실 과제 책임자를 꺼려하기도 하였다. 크로도 과학기술 능력 외에는 팀을 이끌어가는 능력은 별로 였다. 허허 웃거나 시시콜콜 간섭하지 않는 덕분에 그 자리를 보존하고 있다고 봐야헸다.
과제 책임자라고 특별한 혜택은 없고, 사무실 한구석에 하루 종일 처박혀 모니터만 뚫어지게 보았다. 매시간 주어지는 휴식시간을 모르는 듯했고 간혹 커피를 타 마시려 자리를 떴다가 되돌아왔다. 종이컵을 사용하지 않는 탓에 먹그 컵에는 커피 때가 더덕더덕 붙여 있었다. 한번 집에 가져가 씻어오더니 최근에는 이마저도 귀찮아했다.
출장을 다녀온 어느 아침에 크로는 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물어도 대답 대신 웃기만 할 뿐이었다. 얼마 후 팀원 전체가 Workshop에서 돌아오는 길에 점심을 먹으면서 그 의문이 풀렸다. 7천 원짜리 돼지국밥을 각자 출장비에서 낼 수 있지만 크로가 굳이 사겠다고 우겼다. 팀원들이 자기 머그 컵을 닦아줘 고맙다는 이유였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다음날 팀 회의에서 크로는 베이시안 추론을 설명했다. 이 추론에 따르면 관측한 결과를 통해 원인의 발생 확률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머크컵이 깨끗하여지는 이유는 자기 아내가 닦든지, 자신이 닦든지, 팀원들이 닦든지,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닦든지 총 4가지 경우 밖에는 없는데 모든 가능성을 고려하여 볼 때 팀원들이 닦은 것이 확실하다는 주장이었다. 팀원들은 엉터리 같은 추론에 수긍하지 않았지만 혹시 반론이라도 하면 베이시안으로 힘들게 할 것 같아 조용히 듣고 있었다.
퇴근 후 나는 NRC에서 나온 보고서를 출력하여 크로의 책장에 갔다 놓다가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쥐을 보았다. 사실을 말하여 그의 기쁨을 차마 훼손할 수는 없었고, 아침에 김동인의 소설 배따라기를 인쇄하여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