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나이 많고 지혜로운 철학자
나무 목(木)자는 나무 한 그루가 당에 우뚝 선 모양을 본뜬 상형문자다. 여기에 사람 인(人)자를 더한 것이 휴식할 휴(休)자인데, 모양만 봐도 알 수 있듯 사람이 나무에 기대어 편히 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렇듯 나무는 아주 오래전부터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고 위로해 주는 안식처로 우리 곁에 머물렀다.
어릴 적 읽은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사람과 나무가 우정을 나눌 순 없지만, 나무가 사람에게 주는 효용은 다들 알고 있다. 복잡한 서울에 살고 있지만 가로수가 잘 정돈되어 있고, 곳곳에 있는 공원에도 나무가 결코 적지 않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내가 나무를 신경 쓰며 바라본 게 언젠가 싶다(윤중로 벚꽃축제에도 별다른 감흥을 못 느끼는 게 한몫한다고 본다).
우연한 발견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때가 많다. 책을 고르다 보면 그런 경험을 종종 하게 되는데, 제목을 보고 표지를 보고 책장을 휙휙 넘기다 보면 이 책은 괜찮겠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라는 책도 도서관에서 이 책 저 책 둘러보다 발견한 책이다.
나무 의사라... 저자의 직업과 제목으로 유추하건대, 나무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나무의 생태적 습성을 인생의 교훈과 연결한 책이라 예상했으나 막상 읽다 보니 저자의 인생 경험이 더 주된 내용이었다. 결론적으론 이런 구성이 더 만족스러웠고, 나무 자체에 대해서는 '페터 볼레벤'의 책을 더 읽어볼 생각이다.
이제는 알 것 같다. 인생에서 정말 좋은 일들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값지고 귀한 것을 얻으려면 그만큼의 담금질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가 원하는 행복이나 성공 같은 좋은 일들이 우연히 갑작스럽게 찾아온다면 노력이나 인내 따위는 필요하지 않을 거라고.
나무의사 우종영은 본디 천문학자가 꿈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색약 판정을 받아 그 꿈을 포기하게 됐고, 풍족하지 못한 가정 형편으로 학교까지 그만두었다. 이후 동네 형의 소개로 농장에서 도제로 일하게 되면서 나무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갖은 노력 끝에 평생을 나무와 함께 하게 된다.
저자의 인생은 나무의 성장 과정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 싹을 틔운 어린나무는 당장의 생장에 힘쓰기보다 뿌리를 키우는 데 영양분을 쓴다고 한다. 알맹이 없이 겉으로만 빠르게 성장하기보다, 고난이 닥쳤을 때 살아남을 수 있게 힘을 비축하고, 땅속 깊은 곳 물길을 찾아 뿌리를 더 깊이 내리기 위해 집중한다. 당장의 돈벌이에 혹하지 않고,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나무 조경 사업이 붐일 때도 나무를 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나무를 잘 관리하는 것이라는 철학으로 나무 관리 사업에 매진한 모습이, 뿌리를 깊이 내려 흔들리지 않는 나무와 같은 저자의 지금을 만들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나는 나무 대신 창업가를 많이 만나게 된다.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창업의 세계, 뭐라도 해야 하는데 과연 그게 효과가 있을까 스스로에게 늘 의문스러운 게 창업의 세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사소해 보이는 1이 결국은 99를 100으로 만든다고 확신한다. 화려함 대신 조금 더디더라도 내공을 쌓기 위해 노력하는 것, 뿌리를 내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나무에게서 배울 수 있는 삶의 지혜일 거다.
어쩌면 산에 오르는 것은 인생을 사는 것과도 닮은 듯하다. 그저 정상에 오르려고 하면 세상에 있는 모든 산이 다 똑같아 보이지만 천천히 음미하듯 걸음을 떼면 빨리 걸을 땐 미처 보지 못한 아름다운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뭇가지를 비추는 햇살이 시간에 따라 조금씩 기울며 다른 모양의 그림자를 만들어 낸다는 것도 걸음을 늦추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오늘도 퇴근 시간 지하철은 사람으로 가득하다. 피곤에 절은 사람들을 보면 삶이 참 처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앞만 보고 달리면 어떤 곳에 도달할까? 어느 순간 나도 다른 사람에게 저런 모습으로 보일까 싶다. 그래서 가급적 피곤함과 싸우며 책을 읽는다. 이것도 처철한 삶이라면 처절한 삶인가? 허나 이렇게 책 속에서 지혜를 얻지 않는가. 하루에 두 번 당산역을 지나며 바라보는 한강과 하늘의 모습 또한 나에겐 힐링이다.
언행일치(言行一致). 여러 자기계발서나 철학서에서 많이 접했을 메시지인데, 저자가 전하는 철학이 더 마음에 새겨지는 건 저자의 삶과 저자의 말이 일치하기 때문이리라. 바람에 살살 흔들리는 나무를 올려다볼 때 잡념이 사라지고 편안해지듯 책을 읽는 내내 편안한 마음으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문장이 좋아 혹시나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이 책으로 필사를 하는 분들도 많이 찾을 수 있었다.
생명은 참 신비롭다. 언뜻 나무는 흔들림 없이 자라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엇보다 환경에 민감하고 살기 위해 투쟁한다. 인간의 언어와 두뇌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나무만의 지혜가 지금 우리가 보는 나무들의 조상에게서 긴 세월 이어져 왔을 것이다. 이 책의 부제가 '세상에서 가장 나이 많고 지혜로운 철학자'인 이유다.
이 책을 읽었다고 갑작스레 내 취미가 나무를 보러 가는 것으로 변하진 않겠지만, 내 앞에 주어진 것에 묵묵히 집중하는 것이 중요함을 세상에서 가장 나이 많고 지혜로운 철학자의 삶에서 다시금 일깨울 수 있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나무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