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임종 면회
호스피스 병원에서는
콧줄, 수액 하나하나 제거해 가는게 순서라고 한다.
석션을 할 때, 콧줄 피딩한 뉴케어가 계속 같이 올라왔어서
병원에서는 흡인 위험이 있어 뉴케어 먹는 것을 중단하자고 했었다.
나도 사실 오빠가 콧줄을 불편해하는게 느껴져
식이를 그만두고 콧줄을 빼야하나 고민했지만
오빠가 먹는 약 중에 주사로 대체가 안되는 약이 있어
약을 넣으려면 어차피 콧줄은 유지해야한다고 했다.
콧줄을 유지해야한다면 식이를 멈추고 싶지 않았다.
폐렴의 위험이 있는걸 알고 있었지만
식이를 멈추면 오빠를 보내야한다는 사실을 맞닥뜨려야했기 때문에 유지했다.
대신 기존에 먹던 양을 줄여
하루 3번 200ml 씩만 유지했다.
화요일에 콧줄이 목구멍에서 동그랗게 말려있었고
확인을 요청드렸으나 괜찮다고 하셨고
그 상태로 피딩이 되었다.
그 이유에서인지 또는 다른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화요일 밤부터 오빠 입에서 토 같은 것이 나왔다.
혹시 몰라 고개를 옆으로 돌려놨고
자는 사이 아침 피딩도 들어갔고
토는 계속 나왔다.
그리고 내가 6월에 들었던 소리가 들렸다.
"끙 끙 끙 끙 끙"
벌떡 일어나 오빠에게 갔고
간호사선생님을 호출하여 산소포화도를 쟀다.
80대였다.
오빠는 몸이 아무리 힘들어도
수두증 수술을 한 이후 98~99의 산소포화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지난주 목요일 경련이 일어난 이후에도 금새 96을 되찾았었다.
80대면 정말 심각한 상태였는데...
72까지 내려갔다.
산소줄을 꼈고 오빠 상태가 많이 좋지 않다고 했다.
"임종 면회를 해야하나요?"
라는 나의 물음에 가족들을 얼른 부르라는 의사선생님과
혼자 임종을 볼 수도 있지만 옆에 잘 계셔주겠다는 간호사선생님
모든게 갑작스러웠다.
엄마에게 급히 전화해서
동생들을 데리고 얼른 와달라고 했다.
공부하고 있던 첫째 동생과
휴무라서 쉬고 있던 둘째 동생은
한걸음에 집으로 달려왔고
엄마와 금방 도착해주었다.
참고로 나는 사남매의 장녀이고,
막내 남동생은 군대에 있고,
아버지는 해외에서 근무하신다.
다들 오는 내내 차에서 울면서 왔고
도착했을때에는
오빠가 힘들어해서 수면안정제가 들어간 뒤라
오빤 깊은 잠에 빠졌다.
동생들은 오빠와 제대로된 인사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오열했다.
아무리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는 오빠에게 돌아가면서 인사를 했다.
엄마는 그동안 고생 많았다며 나는 걱정하지 말라고
첫째동생도 너무 고생 많았고 고마웠다고 언니는 걱정하지 말라고
둘쨰동생도 오빠 너무 고생많았고 고마웠다고
다들 엉엉 울며 인사를 했다.
나와 오빠의 연애기간 10년,
10년간 동생들에게도 오빠는 친오빠처럼 든든한 사람이었고
엄마아빠에게는 듬직한 사위였다.
첫째동생이 술취하고 걷지 못할 대학시절 같이 데리러 간적도 있었고
대학교에 합격했을땐 애플워치를 선물했으며
해외여행 갈 때도 맛있는 밥한끼 먹으라고 용돈을 주었으며
나 없이 동생과 밥을 먹은 적도 있을 정도로 친했다.
둘째동생이 밤에 연락이 두절되어 엄마가 걱정했을 땐 오빠가 직접 찾으러 나선적도 있었고
우는 엄마를 안아주기도 했었던 오빠였다.
막내동생이 군대에 입대할 때 시계를 사주려 백화점에 갔었던 오빠,
군대에 가서는 허리를 다쳐 MRI를 찍어야 할 때는
몸조심 하라며 검사비를 보내주던 오빠다.
해외에서 일하는 아빠가 3개월마다 한국에 올때면
오빠는 늘 선물을 준비했었고 식사를 함께 했었다.
아빠가 입는 옷의 대부분은 오빠가 휴가때마다 선물한 옷이다.
이런 아빠도 오빠의 소식을 듣고 이틀이 꼬박 걸리는 먼 나라에서 귀국중이다.
아빠가 해외에서 10년 넘게 일하며 이렇게 갑작스레 휴가를 내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다.
엄마는 오빠를 볼때면 시시콜콜한 얘기를 늘어났고
오빠는 열심히 들어주며 엄마의 수다친구가 되어주기도 했었다.
오빠는 늘 내편이었지만 내가 엄마와 다툴땐 어머님께 잘하라고 했던 오빠였다.
이렇게 긴 시간 서서히 우리 가족이 된 오빠와의 이별은
나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에게 큰 슬픔이었다.
매일 울지말라던 엄마도
나보다 더 많이 울고 있었다.
오빠의 가족, 친구들에게도 연락을 돌리고
한명씩 돌아가며 인사를 하고...
이때도 곤히 자는 오빠때문에 임종이 실감이 안났다.
그러다가 첫째동생이 갑자기 오빠 심장이 힘들어보인다고 했고
산소포화도를 쟀는데 40대가 나왔으며 오빠의 손 발이 정말 파래졌다.
청색증을 들어만 봤는데도 바로 이게 청색증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고
산소포화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 때문에
40을 본 나는 오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많아 오빠에게 부끄러운 인사는 못했었는데
그 순간 정말 오빠가 이젠 떠난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은 다 사라지고 오빠에게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 전했다.
오빠, 나 연경이야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고 힘들었지
그리고 나한테 미안해하지마
고마워하지도 마
나는 오빠 만나서 너무 행복했고 좋았어
오빠도 나한테 서운한거 있어도 다 잊고 좋은 기억만 가져가
나도 좋은 기억만 가지고 살께
그리고 나 잘 지낼 수 있게 오빠가 지켜줘
우리 헤어지는거 아니고 다시 만나는거니까
나중에 나 갈 때, 꼭 마중나와줘
그리고 오빠는 착하게 살았으니까 꼭 좋은 곳 갈거야
거기서 아프지말고 잘 지내면서 나 기다려줘
고맙고 사랑해
전할 말을 준비한 것도 아닌데
오빠에게 해야하는 말이 술술 나왔다.
그때였다.
오빠가 갑자기
커어억 하더니 큰 가래를 뱉어냈다.
간호사 선생님은 마지막 가래를 뱉는거라며
희망갖지 말고 인사하라고 했다.
오빠의 산소포화도는 70대까지 올랐고
가래 끓는 소리에 석션을 요청했지만
임종 가래라며 빼주지 않았다.
너무 속상했지만 등을 두들겨주고 있었는데
90까지 오빠가 회복했다.
그리고 오전에 예전에 이런적 있으니
임종이 아니라 폐렴증상일 수 있다고
약좀 놔달라고 부탁드린 끝에
의사선생님께서도 내가 너무 안됐어서 약을 놔주었는데
결과적으로는 폐렴이 맞았는지 증상이 점점 호전되고 있다.
하루가 지난 오늘,
눈을 뜨고 의사선생님께 인사까지하는 오빠를 보며
내일부터 빼자던 영양제를 유지하자고 하셨다.
정말 감사했다.
폐렴 항생제도, 영양제도,
물론 폐렴이 낫는다고 해서
오빠는 일반인처럼 살 수 있는게 아니란걸 안다.
잠시 우리는 인사할 수 있는 시간을 번 것이다.
정말 이별 바로앞에 갔다가 돌아오니
다시 이별을 할 자신이 더 없어졌다.
그래도
집이 아니라
병원에 있어 정말 다행이다.
통증이 없던 오빠라
집으로 갈지 호스피스병원에 있을지 고민했었는데
집으로 갔다면 오빠와 좀 더 빨리 이별을 할뻔했다.
그래서 오늘은 병원이라서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으며 어찌저찌 하루를 마무리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