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서 10장
밤은
완전히 내려앉아 있었다.
마을은
불을 켜지 않았다.
문은 닫혔고,
숨은 낮아졌다.
낮에 남겨진 말들이
아직 공기 속에서
식지 않고 있었다.
윤검은
마당에 서 있었다.
칼은
여전히 뽑히지 않았다.
그러나
손은
검자루를 떠나지 않았다.
이번엔
말발굽 소리가
여럿이었다.
느리지 않았고,
급하지도 않았다.
정확한 간격.
도착이라는 속도였다.
횃불이 켜졌다.
불빛 사이로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명령만 남은 얼굴들이었다.
그들 앞에
사내가 서 있었다.
낮에 왔던 자였다.
같은 얼굴,
같은 기척.
그러나
이번엔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윤검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여긴
지나갈 곳이 아니다.”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마을을 한 번 더
훑어보았을 뿐이다.
그의 시선이
집의 문,
닫힌 창,
숨죽인 그림자들을
차례로 지나갔다.
그리고
윤검에게 닿았다.
“역시나…”
짧은 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손을 들었다.
그 신호 하나로
병사들이
마을의 외곽을
천천히 둘러쌌다.
문을 부수지 않았고,
사람을 끌어내지도 않았다.
포위였다.
윤검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건
베러 온 것이 아니라
남길 수 있는지
확인하러 온 자리라는 것을.
병사 하나가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백호장군님,
처리할까요.”
윤검의 시선이
아주 미세하게 낮아졌다.
검을 쥔 손의 힘이
바뀌었다.
그 순간,
마을 안쪽에서
움직임이 일어났다.
촌장을 중심으로
몇 명의 사내들이
나섰다.
갑옷도,
깃발도 없었다.
그러나
몸에는
검을 들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고려의 남은 무장들이었다.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여기까지 온 자들.
“물러가시오.”
촌장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병사 하나가
비웃듯 발을 내디뎠다.
그보다 빨리,
백호가 손을 내렸다.
“멈춰라.”
짧은 명령이었다.
병사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백호는
윤검을 보았다.
칼을 뽑지 않은 손,
물러서지 않은 발,
사람들 앞에 선 위치.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칼을 들지 않는군.”
윤검은
대답하지 않았다.
백호는
촌장과
그 뒤의 사람들을
다시 한번 보았다.
“여긴
군세가 아니다.”
그 말은
판단이었다.
병사 하나가
입을 열었다.
“백호장군님,
그럼 철수합니까.”
마을의 공기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류다.”
단정한 말이었다.
의심도,
여지도 없었다.
병사들이
질서를 유지한 채
물러섰다.
백호는
윤검을 보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오늘은
남겼다.”
그 말에는
자비도,
위협도 없었다.
기록에
한 줄 남기는
어조였다.
“하지만
남겨진 것은
언제나
움직이게 되어 있다.”
그는
말머리를 돌렸다.
횃불이
하나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을은
끝내
피를 보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도
안도하지 않았다.
윤검은
칼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피는 묻지 않았지만,
이미
머무를 수 없는 선은
그어졌다는 걸
몸이 알고 있었다.
연이
그의 곁에 섰다.
“이제
가야겠지.”
윤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날 밤,
마을은
지켜졌지만,
윤검은
마을을 떠날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칼이
마을을 가르지는 않았으나,
사람과
머무름의 경계는
이미
조용히
갈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