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오기 전의 이름

혼돈의 서 9장

by 연월랑

해가 완전히 지기 전이었다.

마을의 그림자가 길어질 즈음,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지만,
멈출 생각은 없었다.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도
밖을 보지 않았다.
문이 닫혔고,
불은 하나둘 꺼졌다.

마을은
이미 그 소리를 알고 있었다.
지나가는 발굽이 아니라는 것만은
설명 없이 전해졌다.

윤검은
마당에 서 있었다.
칼은 뽑지 않았다.
아직
그럴 이유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공기가
미세하게 달라졌다.

바람이 불었으나
나뭇잎은 흔들리지 않았다.
숨만이
마을과 숲 사이를
천천히 오갔다.

대문 앞에
사내가 섰다.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
인사도, 경계도 없었다.
그저
마을을 한 번 훑어보았을 뿐이었다.

“생각보다
많이 남았군.”

목소리는 낮았고,
감정은 없었다.
그래서
그 말은 판단에 가까웠다.

윤검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여긴
머무를 곳이 아니다.”

사내의 시선이
그제야 윤검에게 닿았다.
잠깐,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대상을 재는 눈이었다.

“지나갈 생각은
없다.”

그는 덧붙였다.

“확인하러 왔다.”

윤검은
칼을 들지 않았다.
그 사실이
사내의 시선을
아주 잠깐 멈추게 했다.

“칼을 숨기는군.”

윤검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작에는
호의도,
실망도 없었다.

“그래.
그럼
지금은 아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설명되지 않았다.
다만
마을의 공기가
한 번 더
조여들었다.

연은
윤검의 뒤에 서 있었다.
말없이.
그러나
물러서지 않은 채로.

사내의 시선이
잠깐
그녀에게 닿았다.

아주 짧았다.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기억을 더하는 눈이었다.

그는
다시 윤검을 보았다.

“이름을 말해라.”

윤검은
숨을 고르고
짧게 답했다.

“최윤검.”

사내는
그 이름을
속으로 한 번
접어 두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해 두지.”

그 말은
위협도,
약속도 아니었다.
기록에 가까운 어조였다.

사내는
말머리를 돌렸다.

“오늘은
남긴다.”

그는
한마디를 더 남겼다.

“하지만
하늘은
항상 다음을 남겨두지.”

말발굽 소리가
숲으로 스며들었다.

그제야
마을의 숨이
조금 풀렸다.

윤검은
여전히
칼을 들지 않았다.
손은
검자루 위에
잠시 머물렀다.

연이
낮게 물었다.

“끝난 거야?”

윤검은
마을 어귀를
바라본 채
대답했다.

“아니.”

그는 말했다.

“이제
시작이야.”

그날 밤,
마을은
불을 밝히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아직 오지 않은 칼의
무게를
말없이 먼저 견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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