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아이 3부

3부작 - 시간

by 연월랑

사무실 안은 오후 햇살로 가득했다.
창가 쪽에서 빛이 길게 미끄러져 들어왔다.

유리 위에 번진 빛이
문득 다른 장면과 겹쳤다.

섬에서,
카메라 뷰파인더로 들여다보던 풍경.
바람에 흔들리던 수평선과
조금 늦게 따라오던 파도의 빛.

그 기억은
지금의 햇살 위에 잠깐 얹혔다가
이내 사라졌다.

책상 위에는
기차표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어디 가?”

그가 물었다.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었다.

“지방.
일이 다 끝나서,
다시 돌아가려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창가에서 빛이 끊겼다.

햇살이
그녀의 얼굴 윤곽을 스쳤다.

그 순간,
섬에서 보던 프레임 하나가
잠깐 겹쳐 보였다가
곧바로 어긋났다.

프레임 안에 담기지 않는 것들은
언제나
조금 늦게 도착했다.

“뭐가 묻었어?”
그녀가 물었다.

그는 잠깐 망설이다 말했다.

“아니.
그냥 예뻐 보여서.”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농담하지 마.”

웃음은 짧았고,
그 뒤에 남은 공기는
금세 가벼워졌다.

그는
그 가벼움을
붙잡지 않았다.

창문이 미세하게 울렸다.
바람이 스쳤다.

“여기선
바람 소리가 오래 못 가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리를 듣기보다
창밖의 반사를 먼저 보고 있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녹음기를 꺼냈다.

“섬에서 녹음한 거야.”

그는 잠시 그것을 보았다.
켜지도,
듣지도 않았다.

“가지고 있어.”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녹음기를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는
그 무게가
손에 남아 있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했다.



그날 밤.

사무실에는
그 혼자 남아 있었다.

불을 끄지 않은 채
책상 앞에 앉아
섬에서 찍은 사진들을 다시 펼쳤다.

바다,
등대,
부두 끝에 늘어진 그림자.

사진들은
정확했고,
구도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사진을 넘길수록
같은 장면에
조금씩 어긋난 시간이
겹쳐지고 있다는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녹음기를 켰다.

파도 소리,
바람이 낮게 스치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배의 엔진음.

사진을 보며
그 소리를 들었다.

소리는
프레임 밖에서 시작돼
프레임 밖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같은 장면을 담은 사진들 위로
소리만
계속 지나갔다.

사진은 남아 있었고,
소리는
머물지 않았다.

그는
사진을 한 장 덮었다가
다시 펼쳤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 사이로
무언가가
이미 지나가 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그 아이의 이름을
불러보려 했다.

입술까지는
분명히 올라왔지만,
끝내 소리가 되지는 않았다.

이름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이미 프레임 밖으로
지나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그는 더 이상
붙잡지 않으려 했다.

그에게 그녀는
언제나
바람이었다.

찍히지 않고,
머물지 않는 것.

그는 녹음기를 끄지 않았다.

켜 둔 채로
밤이
조금 더
지나가도록 두었다.



섬의 새벽.

그녀는 등대 아래에 서 있었다.

바다는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파도는
늘 같은 속도로
부서지고 있었다.

바람이 낮게 흘렀다.

그녀는
녹음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바람이 지나가는 방향을
잠시 바라봤다.

이곳에서는
붙잡지 않아도
머무는 것들이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돌아왔어.”

섬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바람이 스쳤다.

그건
붙잡히지 않았고,
붙잡힐 필요도 없었다.

그녀가
마음을 두고 온 곳은
늘 이쪽이었으니까.

시간은
이미
지나간 뒤에만
형태를 남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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