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서 8장
횃불이
능선을 잠식했다.
불빛은
불이 아니라
숫자였다.
산길은
더 이상
길이 아니었다.
윤검은
몸을 돌렸다.
옆구리의 상처가
숨을 잡아끌었다.
한 발을 옮길 때마다
몸이
조금 늦게 도착했다.
뒤쪽에서는
그림자 무사의 기척이
사라져 있었다.
쓰러졌는지,
물러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그 자리에 없다는 사실만이
분명했다.
그 순간이었다.
“이쪽이다.”
낮은 목소리가
숲의 안쪽에서 흘러나왔다.
윤검이 고개를 돌리자,
검은 옷의 사내가
나무 사이에서
손짓하고 있었다.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러나
성급함도 없었다.
“여긴
막힌 길이다.”
잠시 뒤
그가 말했다.
“따라와라.”
윤검은
묻지 않았다.
설명은
이미
살아남는 데 필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들은
숲을 가르며 움직였다.
군사의 발소리가
뒤를 덮쳤지만,
사내는
항상
반 박자 앞서 있었다.
바위 뒤에
몸을 숨겼을 때,
윤검은
그의 얼굴을
처음으로
제대로 보았다.
말보다
검이 먼저 움직이던 눈.
한때
말이 칼보다
무겁던 자리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의 눈이었다.
기억이 아니라,
지워지지 않은 잔상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 당신은.”
사내는
부정하지 않았다.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을 뿐이었다.
“끝까지
남아 있던 사람이다.”
그 말은
자기소개가 아니라,
패배를 인정하는 방식에 가까웠다.
멀리서
군사의 소리가
희미해졌다.
숫자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사내는
검을 거두었다.
“여기까지다.”
윤검이
몸을 세우려 하자,
사내가
손을 들어 막았다.
“더 가면
넌 죽는다.”
잠시 침묵.
숲이
먼저 숨을 골랐다.
“살아남은 자의 몫은
다른 데 있다.”
윤검은
그를 바라보았다.
“왜
나를 도왔지.”
사내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거짓인지,
고백인지는
윤검도
구분하지 못했다.
“나는
이긴 쪽이 아니라,
지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가 말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선택한 쪽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그는
뒤돌아서며
덧붙였다.
“왕의 칼도,
권력의 칼도 아니다.”
잠시 멈췄다가
조금 늦게 말했다.
“그저
사람이 덜 죽는 쪽이다.”
그리고
숲 속으로
사라졌다.
윤검은
연이 머무는 집으로
향하다가
걸음을 멈췄다.
불은
이미 꺼져 있었고,
사람들은
숨을 낮춘 채
밤을 견디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윤검의 숨만이
조금 늦게
돌아왔다.
마을 초입에서
그는
발을 멈췄다.
멀리서
연의 모습이
보였다.
연은
달려오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돌아왔네.”
연의 시선이
윤검의 옆구리에
머물렀다.
“많이 다쳤어?”
윤검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걸을 수 있어.”
그 말은
상태가 아니라
의지에 가까웠다.
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도와야 할 것 같았어.”
잠시 후
그녀가 덧붙였다.
“그래서
사람을 보냈어.”
윤검은
더 묻지 않았다.
그는
연의 곁에 섰다.
그 순간,
자신이
언제부터
혼자가 아니게 되었는지
처음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과 함께
짧은 감각 하나가
스쳤다.
검보다
무거운 것이
생겼다는 감각.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연은
잠시
산 쪽을 바라보았다.
“여기서는
더 이상
머물 수 없어.”
바람이
마을을 스쳤다.
그 바람 속에는
떠나라는 말보다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이
먼저 실려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함께 있어.”
연이 말했다.
윤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그는
검을 씻지 않았다.
아직
내려놓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으로
그는
검이 아니라
사람을 먼저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윤검은
아주 잠깐
이 생각을 했다.
만약
그 사람이 없었다면,
나는
더 쉽게 움직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은
곧 사라졌지만,
사라진 자리에는
이름이 남았다.
이번에는
칼이 아니라,
자신이
위험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