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사라지는 곳

침묵의 서 10장

by 연월랑

새벽은
아직 오지 않았다.

도성의 끝자락,
사람들이
서로의 이름을
묻지 않는 골목에서
윤검은
연과 마주 앉아 있었다.

그 밤의 일은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긴 자도,
베인 자도 없었다.

다만
칼이 더 이어졌다면
모두가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것이다.

윤검은
그 사실을
몸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인지,
다른 형태의 죽음인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연은
주머니를 꺼냈다.

윤검은
처음으로
그것을
정면으로 보았다.

“안에 있는 것,
알고 있었어?”

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그녀는
주머니를 열지 않았다.
대신
그 무게를
손바닥 위에
올려두었다.

“이게 남아 있으면,
칼은
멈추지 않아.”

윤검은
말없이
그 주머니를 보았다.

두 장의 종이.
하나는
연의 혈통을 증명하는 것,
다른 하나는
정도전의 설계.

살아 있으면
누군가는
명분으로 삼고,
누군가는
칼을 들 이유로 삼을 것들.

그러나
윤검은
그것이 전부인지
끝내 확신하지 못했다.

명분보다
더 깊은 무언가가
이미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왜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어.”

윤검의 질문에는
책망이 없었다.

연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말했다.

“지킬 사람이
없었을 땐,
이게
나를 지켜줬어.”

그리고
아주 낮게
덧붙였다.

“지금은
그 반대야.”

그 말은
윤검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고백에 가까웠다.

연은
주머니를 열었다.

불은
크지 않았다.
의식도 없었다.

종이는
짧은소리를 남기고
사라졌다.

재는
생각보다 오래
공중에 머물렀다.
그을린 냄새가
골목의 벽에
잠깐 붙었다가
늦게 떨어졌다.

윤검은
막지 않았다.

그러나
막지 않은 이유가
용기였는지,
포기였는지는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는
문득
이렇게 끝내면
편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은
부끄러울 만큼
빠르게 스쳤고,
그래서 더
정확하게 남았다.

그는
무언가를 잃고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그러나
그게
무엇인지는
끝내 말로 붙잡지 않았다.



연은
불이 꺼진 자리를
오래 바라보았다.

“이제

아무것도 아니야.”

윤검은
천천히 말했다.

“그래도
여기 있어.”

그 말이
충분한지,
그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른 말을
찾지 못했다.

말이 늘어날수록
지금의 선택이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동이 트기 전,
윤검은
칼을 내려놓았다.

버리지도,
부수지도 않았다.
그저
곁에서
떼어놓았을 뿐이었다.

이제
그 칼은
사람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든 다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이
그를
조금 늦게 숨 쉬게 했다.



같은 시각,
궁 안에는
등불 하나가
아직 켜져 있었다.

이방원은
창가에 서 있었다.

하륜이
조용히 말했다.

“주머니는
사라졌습니다.”

이방원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확실한가.”

“태울 이유가
있는 자만이
태우는 방식이었습니다.”

잠시 침묵.

“그럼
그 둘은?”

하륜은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백성입니다.
이름도,
명분도,
쫓을 이유도 없습니다.”

이방원은
등불을 하나 끄며
말했다.

“주머니가 없으면,
칼도
멈추겠지.”

하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본 것은
칼이 아니라,
칼이 사라진 뒤에도
끝내 정리되지 않는
사람의 방향이었다.



궁을 나서는 길,
하륜은
아주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태조의
그림자였던 무사.

왕을 지키기에는
이 시대가
너무 시끄럽다고
말하던 자.

그는
어느 쪽에도
가지 않았다.

하륜은
그 선택을
기록하지 않았다.

기록하지 않는 것이
이 시대에서
가장 정확한 방식이라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기록되지 않은 선택이
언젠가
가장 먼저 돌아와
이름을 부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함께 알고 있었다.



날이 밝기 전,
윤검과 연은
도성을 떠났다.

어디로 가는지는
정하지 않았다.

사람이 적고,
말이 늦게 닿는 방향으로
걸었다.

왕조는
그날도
움직였을 것이다.

새로운 이름들이
칼을 들었고,
새로운 명분들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길 위에는
더 이상
그들의 이름이
놓이지 않았다.

이제
이야기는
그들을
부르지 못했다.

그리고
윤검은
처음으로
알았다.

이름이 사라진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편도
아니게 된다는 뜻이라는 것을.

그 사실이
자유인지,
고립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고립 쪽이
조금 더
가까웠다.

이전 09화남겨진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