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공기가 아직 덜 깨어 있을 때 집을 나왔다.
골목은 조용했고,
문을 닫은 가게들 위로 얇은 빛이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나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창문에 닿은 숨이 금방 사라졌다.
내가 있었던 자리도,
그 숨처럼 금방 지워질 것 같았다.
버스가 움직이자 익숙한 거리들이 뒤로 밀려났다.
낮은 건물,
닫힌 셔터,
아직 켜지지 않은 간판들.
특별히 바라볼 이유는 없었지만,
시선은 계속 밖에 머물렀다.
유리 위에 겹쳐진 풍경들은
오래된 사진처럼 느리게 흘렀다.
사진 속 인물이 나인지,
아닌지 잠깐 헷갈렸다.
몇 정거장쯤 지나
앞쪽 좌석에 앉은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혼자였고,
가방은 발치에 놓여 있었다.
코트 깃을 세운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버스가 공원 옆을 지날 때,
그녀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
비어 있는 나무들 사이로
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길이 어디로 가는지는,
그녀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다시 앞을 보았다.
그 여자를 다시 확인하지 않았다.
그 장면은 특별한 일로 남지 않았다.
버스는 역으로 향하고 있었고,
나는 곧 내려야 했다.
내려야 한다는 사실만이,
내가 여기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역 안은 밝았다.
플랫폼 위에는
각자의 방향을 향해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형광등 아래에서
공기는 얇게 고여 있었고,
나는 열차에 올라
창가에 앉았다.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들어오는 소리를 기다렸다.
누군가의 이름이 불렸지만,
내가 아닌 것 같았다.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풍경은 단순해졌다.
들판과 도로,
다시 신호등.
처음 보는 곳이었지만,
어렵지는 않았다.
길은 그냥 이어져 있었고,
나는 그 위에 놓여 있었다.
문득,
내가 길 위에 있는지
길이 나 위에 있는지
잠깐 알 수 없었다.
도시에 도착했을 때,
공기는 조금 더 차가웠다.
높은 건물들 사이로
불빛이 일찍 켜지고 있었다.
노란빛이라기보다,
천천히 번지는 기척에 가까웠다.
나는 가방을 메고 밖으로 나왔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정하지 않았다.
정하지 않아도,
어차피 도착할 곳은 많지 않을 것 같았다.
가방 안쪽에서
얇은 종이 한 장이 구겨진 채 걸렸다.
펼치지 않고,
다시 밀어 넣었다.
처음 보는 가게들이 이어졌다.
유리 안쪽에서는
사람들이 말없이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따뜻함은 유리 너머에서만 남아 있었고,
거리 위에는 조용한 기척이 흘렀다.
나는 잠깐 멈춰 섰다가,
다시 걸었다.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이해하는 순간,
내가 이곳에 속하게 될 것 같았다.
지하철을 탔다.
노선도는 복잡했지만,
안내 방송은 차분했다.
낯선 이름들이 차례로 불렸고,
나는 그중 하나에서 내렸다.
불편하지 않았다.
이 도시에서는,
누구도 나를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바라보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해가 지고
눈발이 조금 흩날렸다.
거리의 불빛이 또렷해졌다.
눈은 바닥에 닿기 전에
빛을 잠깐 머금었다가 흩어졌다.
나는 따뜻한 음료를 하나 사서
손에 쥐고 걸었다.
손바닥 위에서
온기가 천천히 퍼졌다.
온기가 사라지기 전에,
내가 먼저 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잠깐 걸음을 멈췄다.
연락처를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대로 두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주머니 속에서 손이 한 번 움직였다가,
그대로 멈췄다.
나는 아직 이름이 적히지 않은 자리에 가까웠고,
어디에도 오래 머물 필요는 없었다.
이미 정해진 문장들 바깥에서,
조금 늦게 이어지는 쪽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도시는 나를 붙잡지 않았고,
나는 이곳에 남아야 할 이유를 찾지 않았다.
어딘가에서는,
누군가가 같은 계절을 다른 방식으로 지나고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은 조용히 이어지고 있었다.
무언가를 잃지 않아도 되었고,
무언가를 반드시 가져야 할 필요도 없었다.
길 위에는 얇은 공기가 남아 있었고,
그 위에서 나는,
조금 더 멀리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멀리 간다는 것이
앞으로 가는 것인지
사라지는 것인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유리창에 비친 빛이
잠깐 내 얼굴을 스쳤다가,
그대로 지나갔다.
그 얼굴이
조금 낯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