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도, 경주의 숨

돌과 바람이 남긴 오래된 온기

by 연월랑

아침이 경주에 닿을 때,
남산의 그림자가 먼저 느리게 풀렸다.
밤새 식어 있던 돌 위로
햇빛이 성급하지 않게 온기를 얹었다.

손바닥을 올렸다가
금세 떼지 못했다.
차가움과 미묘한 따뜻함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조용히 함께 있었다.
이 도시의 아침은
언제나 그렇게 시작되는 것 같았다.

담장을 스치던 바람은
향나무 냄새를 실어와
코끝 어딘가에서 잠시 머물렀다.
또렷하지도, 친절하지도 않은 향.
그저 “여기 있다”는 숨 정도만
조용히 남기고 흘러갔다.

골목을 걸을 때
발밑의 돌은 작은 소리를 냈다.
익숙하면서도 매번 다른 울림.
처마 끝이 흔들릴 때마다
짧은 공기가 스쳤고
나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낮추곤 했다.

첨성대 앞에 서자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둥근돌들이 너무 오래
그 자리를 지켜왔기 때문인지
손끝을 대는 일조차 조심스러웠다.
잠시 머뭇이다가
가볍게 짚었을 뿐인데
알 수 없는 떨림이
손바닥 안으로 번져왔다.

누군가는 이 자리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겠지.
그날의 밤은
지금과 같았을까,
아니면 전혀 다른 공기였을까.
완성되지 못한 생각만
잠시 머물다 사라졌다.

늦가을의 기억 하나가
불쑥 되살아났다.
마른 낙엽이 발밑에서
사각 하고 울리던 오후.
그 소리가 유난히 선명해
걸음을 멈췄던 장면이
지금의 공기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분황사 담장을 지날 즈음
바람이 다시 불었다.
향나무 냄새가
가슴 언저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맑다거나 따뜻하다 말하기엔
조금 애매한 감각.
하지만 묘하게 편안했다.
이 도시가 오래전부터
여기 있어왔음을 알리는 듯했다.

해가 낮아질수록
돌의 색은 더 부드러워지고
그늘은 길어졌다.
사람들의 발소리는 멀어졌고
남은 공기만
느린 속도로 움직였다.
나는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보며
이 시간의 결을 눈에 담았다.

경주는
말이 많지 않은 사람 같았다.
필요한 것만 보여주고
나머지는 스스로 느끼게 하는,
그런 조용한 거리감.

그래서일까.
여기 서 있으면
마음이 괜히 고요해졌다.
어수선한 생각들도
잠시 숨을 고르는 듯
서서히 가라앉았다.

돌과 바람과 빛.
그리고
말없이 흐르는 오래된 공기.
그 사이에 서 있는 동안
나는 누군가의 시간이 아니라
이 도시의 시간 속에
잠시 머물렀다.

돌아서는 순간
조금의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붙잡고 싶지는 않았다.
경주는
보내는 법까지
참 조용히, 잘 알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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