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닿기 전, 감각이 먼저 지나가는 자리
아무것도 쓰지 않은 종이를 바라보면
먼저 빛이 움직였다.
말보다 앞서는 것은 언제나 그런 미세한 흔들림이었다.
소리가 없는데
어딘가에서 낮게 울리는 결이 있었다.
그 결이 마음의 얇은 층을 스치면
문장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이미 어딘가에서 천천히 깨어나고 있었다.
향이 스쳐 지나가면
모양 없는 감정이 잠시 떠올랐다가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사라진 뒤의 공기만
작게 흔들렸다.
손끝에 닿은 온도는
어떤 기억보다 오래 머물렀다.
기억은 말이지만
온도는 말이 아니어서
그저 조용히 가라앉을 뿐이었다.
가끔은
한 번도 소리 내 말하지 못한 문장들이
손끝에 맴돌다 사라져
나만 아는 흉터처럼
아주 미세하게 남아 있었다.
글을 쓴다는 건
때때로 쓰려는 마음이 아니라
가라앉는 감각을 그대로 놓아두는 일인지도 몰랐다.
빠름도 느림도 없었다.
그저
지나는 것과 남는 것 사이의
아주 얇은 틈만이 있었다.
문장이 태어나는 순간은
나도 모르게 지나가는 빛이
내면의 어떤 결과 잠시 닿을 때였다.
닿고,
미세하게 흔들리고,
곧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그 짧은 떨림.
그 떨림이 잦아들면
말이 하나 남았고,
남은 말은
그 자체로
이미 어딘가 멀어지고 있었다.
독자가 무엇을 느끼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지나간 파동이
누군가의 마음 어딘가에
아주 조용히 머물다 갈 수 있다면—
그 정도의 흔들림이면
어쩌면, 충분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