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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영 Jul 02. 2023

우리가 만나지 않아도

천선란,『노랜드』를 읽고…

  다정한 세계가 있다고 믿었다. 모든 여린 것을 끌어안는 멋진 어른이 되겠다고 다짐했던 시절도 있었고. 하지만 스무 살을 한참 넘긴 나는 어땠나. 그저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시간의 경계선을 넘어가도 꿈꾸던 이상세계는 없었으니까. 여전히 세상은 전쟁 중이고, 어른들은 제 몫을 다하지 못하며, 여기 우는 것에도 값을 치러야 하는 아이들이 있다. 이제는 나에게서 그토록 미워하던 당신의 모습을 종종 본다. 어린 시절 꿈꾸던 나는, 그리고 세상은 정말 어디에도 없는 걸까? 『노랜드』는 이런 나를 위로했다. “괜찮아. 우리의 세계는 남아 있어. 구원한 사랑이 있는” 그래서 닿지 못할 편지를 쓴다. 영원히 만날 수 없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들을 그리면서.       




1. <흰 밤과 푸른 달>, 명월에게     

  명월아, 우주는 어때? 거기서도 환하게 웃고 있을 너의 모습을 떠올리니 나는 괜히 눈물이 나. 맞지 않기 위해 애쓰며 웃었다는 네 말이 도저히 잊히지 않아서. 강설이 말하기를 너는 푸른 눈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 눈물을 참고 참다가 결국 눈에 가둬버린 걸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 너에게 편지를 써. 네 눈을 보고 전하면 참 좋을 텐데. 그건 좀 아쉽네.

  있잖아, 명월아. 부모는 너를 가장 보호해 줬어야 하는 어른이었어. 하지만 너를 아프게만 했지. 그러니까 너는 부모를 마음껏 미워할 자격이 있어. 괜찮아. 나는 네가 그 사람들을 미워하고 원망하다 끝내 용서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거기서는 마음껏 울기도 하고 그래. 나는 네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는데, 얼마나 참았을까 너는. 그래서 네게 울어도 된다는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어. 누구나 한 시절쯤은 아이로 살아 봐야 하잖아. 그 시기는 지나간 게 아닌 거야, 쌓인 거지. 네 푸른 눈에.

  너는 지구에서 이토록 큰 상처를 받았는데, 그런 네가 어떤 마음으로 인류를 구하기 위해 늑대의 유전자를 심었는지 나는 감히 상상할 수 없을 거야. 선택지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말이야. 그래도 나는 네 인생이 절대 불쌍하거나 안쓰럽다고 생각하지 않아. 오히려 고개를 숙이지 않는, 지키기 위해 싸울 줄 아는 너는 강하고 용감해. 그래서 멋있었어. 하지만 네가 겪은 아픔이 누구에게든, 어떤 방식으로든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 너도 그걸 바랄 거라 믿어. 내가 아는 너라면. 지금도 지구에는 명월이 네가 너무 많거든. 내가 지키려 애쓰는 아이도 어른의 보호를 받지 못해서 많이 다쳤대. 아직도 이 전쟁은 끝나지 않았어. 상처를 모으고 모아 희망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하는 현실이 모질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잖아. 지구에 또 다른 명월이 너를 많이 만들지 않도록, 아이들이 편히 울 수 있도록 내가 싸워 지킬게. 네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니 너는 거기서도 멋지고 눈부시게 살아줘.      

  사랑하는 명월아, 늦었지만 너를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문득 지구가 파란빛으로 물들었다는 느낌이 들면 네 푸른 눈을, 네가 삼킨 눈물을 떠올리며 힘낼게. 처음에는 네가 떠나서 더없이 미안하고 슬펐지만, 네가 어딘가에 머물러 있잖아. 아직 살아 숨 쉬고 있잖아. 그래서 위로가 돼. 인간 없는 그곳이 네게 더 다정할 테니까. 그리고 슬픔은 남겨진 자의 몫이잖아. 그러니까 너는 그저 오래도록 지도에 없는 곳에 머물러주기를, 그곳에서는 아프지 말기를. 우리는 만나지 못하겠지만 나는 너를 여전히, 너무나 사랑하고 있어. 안녕.



          

2. <옥수수밭과 형>, 첫 번째 형에게     

  안녕, 그곳에서는 아프지 않고 편안하니? 우리는 서로 이름조차 모르는 사이라 너를 부를 수 없다는 사실이 조금 슬프지만, 그건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겠지. 나는 네가 무척이나 친근하게 느껴지거든. 너처럼 백혈병을 앓았기 때문일까. 너무 어릴 때라 기억조차 흐릿하지만, 그 병이 완치 후에는 마음으로 번지더라고. 그래서인지 나는 너와 비슷한 점이 너무 많아. 눈치가 늘었다거나, 아픈 네가 가족들에게 더 미안해했다는 그런 마음들 말이야. 나도 언제부터인지 보고 싶지 않은 마음들이 보이고, 피할 수 없는 감정이 생기더라고. 그래서 본 적도 없는 ‘진짜’ 네가 너무 그리워. 이 마음을 담아 전할 수 없는 말을 몇 자 남겨.     

  너는 동생에게 똑같은 기억을 지니고 있으면 같은 사람이라고 했지만, 나는 아니라고 믿어. 네가 떠나야 하는 인간을 계속 붙들고 있는 건 잔인한 일이라 말했잖아. 그러니까 사실 너도 알고 있었던 거지? 너를 대체할 수 있는 두 번째, 세 번째는 없다는 것을. 기억은 같을지 몰라도 네 다정함이나 단연함 같은 것은 복제하거나 대체할 수 없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여전히 세상이 참 원망스러워. 여전히 상처를 입고 떠나는 ‘진짜’들이 많거든. 나와 너는 왜 병에 걸렸을까? 왜 아직도 세상에는 아픈 아이들이 생겨날까? 왜 순하고 사랑스러운 모든 것은 앞다퉈 떠나는 걸까? 이렇게 하염없이 좌절하고 현실을 탓해. 세상을 이해하기에는 내가 아직 어린가 봐. 어제 히크만 주머니*를 만들다가도 문득 다 소용없는 일이 아닐까, 주저앉고 싶더라고. 고작 이 작은 주머니가 아이들의 크디큰 아픔을 감쌀 수 있을지 생각하면서.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을 거야. 가짜가 진짜를 대체하지 못하도록. 나는 너무나 작고 나약해서 긴 여정이 되겠지만 그래도 너를 알게 되어 다행이야. 아픈 몸으로도 동생을 업고 두 시간 동안이나 옥수수밭을 걷던, 동생의 말을 끝까지 들어줬던 네 따스함을 떠올리면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 것도 같거든.

  나는 어릴 때 오늘 잠들지 않으면 내일이 오지 않으리라 믿었어. 너도 이 마음 잘 알거라 믿어. 이 때문일까 나는 세상의 아픔들이 내일이 기대되는, 내일을 기다리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그래서 이 행성에도 아직 다정함이 남아 있다고 알려주고 싶어. 너를 머물게 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했던 그 다정함 말이야. 이미 저 멀리 빛나는 별이 되어버린 너는, 나의 잊고 싶은 기억이기도 하고 그리운 순간이기도 해. 이렇게 흔적이라도 남아줘서 나는, 그리고 네 동생 푸코는 너를 추억할 수 있어. 미안하고 또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 네가 너무나도 보고 싶지만, 아직 세상이 추워. 그러니까 돌아오지는 마. 우리는 과거에서 가끔 만나자.


* 소아암 어린이에게 선물하는 히크만 카테터를 감싸는 주머니




3. <두 세계>, 유진에게     

  안녕, 유진아. 네게 그다지 좋은 기억은 아니겠지만, 나는 네가 떠난 행성에서 편지를 보내고 있어. 지금 네가 머무르고 있는 그 세계를 내가 조금 이해할 수 있다고 하면 너는 나를 이해할까? 너라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 너와 나의 세계는 너무도 다르다고. 그래도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 네게 편지를 남겨.     

  어쩌면 네 생각처럼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몰라. 너도 나를, 나도 너를. 겪을 수 없는 삶이잖아. 그래도 나는 네가 다른 행성으로 떠났다고 생각하면, 어딘가 다른 세계가 있다고 믿으면 위로가 돼. 우리가 이 행성에 태어나 슬프고, 아프다는 사실만은 같잖아. 내 세계도 깊은 우물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하거든. 끝까지 차오르지 못하고 한순간에 텅 비어버리는 그런. 우리는 어쩌다 이 행성에서 태어났을까?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저들에게 이 행성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갖는 우울과 상실이 있다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건 대학을 나왔거나 직업이 있다고 해서 사라지는 아픔이 아니라고, 우리의 행복의 기준은 다르다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너도 그래서 떠난 거지? 살기 위해 죽는다는, 그 말의 무게를 느끼게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우리는 살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정말, 온 힘을 다해, 살고 싶은 거니까.      

  너는 떠났지만, 나는 이 행성 어딘가에 우리가 남아 있다고 믿어. 살고 싶다고 소리치면서 떠돌아다니는 우리가. 그래서 떠나지 못하고 계속 머무를 것 같아. 이해하지 못해도 서로 사랑할 수는 있잖아. 사실, 네게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 유라가 너를 사랑했다고, 끝내 너를 이해하지 못했을지라도, 정말 사랑했다고 말이야. 나도 그런 마음으로,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면서 이 행성에 더 머물러보려고. 언젠가 죽지 않아도 다른 세계로 갈 수 있을 거라 믿기도 하고. 그때가 오면 너의 세계로 희미한 신호를 보낼게. 오고 싶으면 잠깐 들러줘. 그럴 일은 없겠지만. 왜냐면 난 네가 다정한 세계를 찾아갔다고, 그곳에서 이제 행복해졌다고 믿거든. 그냥 지구가 마냥 춥지는 않았다고, 여기도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여전히 있다고 전하고 싶었어. 거기서는 너의 새벽이 아프지 않고 마냥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이만 줄일게. 




  대부분의 편지를 저무는 태양을 바라보며 썼다. 우리는 그무러지는 하늘과 같아서 영원히 함께할 수 없겠다는 마음으로. 어쩌면 한 번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것이 소망이라 할지라도, 어딘가에 다정한 당신이, 그리고 세계가 있다고 믿는다. AI는 결코 헤아리지 못할 비합리적인 사고에 우리의 영원함이 있다고. <푸른 점>의 시에라가 화산재로 덮인 푸른 점으로 돌아간 것처럼, <이름 없는 몸>에 강하지만 악하지 않은 네가 있었던 것처럼, 끝끝내 버텨 살기를 택한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의 이인처럼. 우리 만나지 못하더라도 타협하지 말고 다정한 세계에 머물다 가자. 세상의 가장자리에 있는 약한 것들을 지키려 애쓰면서 멋지게. 온종일, 변치 않는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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