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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니 Nov 07. 2023

당겨줘서 고마워.

놓지 않아 다행이다.

[얘들아 우리 올해 가기 전에 만나자.]


중학교 친구들의 단이 오랜만에 울렸다. 반갑지 않은 연락이었다. 사실 3년 동안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단톡방 안에서 나는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만나자는 날짜를 보니, 나도 일정이 있고, 남편도 회사에 출근하는 날이다. 이번에도 못 나가겠다고 잘됐다고 생각했다.


[홍지야 보고 싶다. 이번에는 나올 수 있니?]


'아이가 아파'

'남편이 출근해.'

'선약이 있어.'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나가지 않을 핑계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거의 3년 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다. 언젠가 기회를 틈타 단톡방을 나와야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난 그 모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 같았고, 친구들의 모임에 내가 미안한 걸림돌이 된 느낌이었지.



그런데 내가 보고 싶다니. 미안함과 고마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를 던진 듯 내 마음에 묘한 물결이 일렁였다.

[홍지가 오기 편한 대로 장소 잡고 일찍 보자. 평택까지 가려면 시간 걸리잖아.]

저 카톡을 보고 어찌 안 나갈 수 있단 말인가.. 남편은 출근하는데, 아이를 데리고 버스 타고 서울까지 가는 건 막막했다. 어쩔 수 없이 바쁜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혼자 서울로 외출하는 게 도대체 몇 년만인가. 직장 그만둔 뒤로 처음이니 10년이 넘어간다. 친정엄마한테 아이를 맡기고 놀러 나간다는 생각에 미안해 죽겠는데 설상가상 전 날 열이 오른 딸을 간호하느라 잠 한숨 자지 못했다. 신호만 건너면 버스정류장인데, 우습게도 목적지로 가는 버스 두 대가 동시에 지나가버린다. 괜히 나간다고 했나.



나는 비어있는 구석 자리를 찾아 앉았다. 이어폰을 꽂고 플레이리스트를 켰다. 아이브를 좋아하는 딸 때문에 아이돌 노래로 가득한 내 플레이리스트.

'내가 좋아하던 노래가 뭐더라. '

임창정, 케이윌, 멜로망스, 적재, 폴킴, 로이킴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나만의 플레이리스트가 완성됐다. 오랜만에 듣는 느린 템포의 노래와 창밖에 보이는 가을풍경이 마음 한편에 따스한 온기를 불어넣어 줬다.




"얼굴 보니까 너무 좋다. 우리 이렇게 다 모인 게 몇 년만이야."

나를 보며 너무 반가워하는 친구들의 얼굴을 한 명씩 들여다보았다. 사실은 내가 너희를 더 그리워하고 하고 있었구나.

"우리 3학년 때, 영화관 간다고 사복 챙겨갔던 거 생각나? 극장 화장실 안에서 옷 갈아입으면서 난리도 아니었잖아. 미영이는 화장실에서 바지 입다가 넘어졌잖아. 큭큭. 그땐 교복이 왜 이리 안 예뻐 보였는지 몰라."

옛날 추억을 하나 둘 얘기하다 보니, 그날의 냄새, 분위기, 우리들의 표정들이 나를 따뜻하게 감싸온다. 3년 동안 약속을 피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즐거운 수다쟁이가 되어 웃고 있는 내 모습이 갑자기 민망해지기도 했다.




불안정했던 10대, 같은 추억을 공유한 우리는 어릴 적 묻어둔 타임캡슐을 하나씩 열어보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마음이 들떠서 그랬을까. 뜬금없이 아무도 묻지 않은 나만 알아야 하는 비밀이야기를 꺼냈다.

"나 요새 브런치에 글 쓰고 있어."

민망했다. 변변한 직장도 없고, 전공도 살리지 못했고, 경력 없는 전업주부가 글이나 쓰고 있으니 팔자 좋다고 생각하려나. 아직 잘 쓰는 글도 아니면서 왜 말했지,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때,

[너무 멋있다. 너 잘할 거 같아. 글 볼 수 있어?]

아이가 초등학생이라 챙겨줄 것도 많을 텐데 글을 쓰기 시작한 내가 멋있단다.(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아직 보여줄 실력이 안된다며 손사래를 치는데 한 친구가 커다란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사실 나도 글 쓰고 있어. 아직 부족해서 아무한테도 말은 안 했는데, 지금 퇴고 중이야. "

친구는 자신이 쓴 소설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21년부터 쓰고 계속 수정 중이며 내년엔 출판사에 보내볼 계획이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글쓰기 얘기는 한동안 이어졌다.



아직 한참 모자란 글실력이 창피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브런치에 대한 이야기를, 3년 내내 만남을 피했던 중학교 친구들에게 처음으로 얘기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우린 그렇게 다음 약속 날짜를 잡았다. 잡고 있던 끈을 언제 놓을까 고민했던 나를 끌어당겨준 친구들 덕분에 내 마음 안에 깊숙이 묻어뒀던 행복한 시간들을 다시 찾게 됐다.


오랜 친구들이 주는 축복 중의 하나는
당신이 그들과 함께일 때 바보짓을 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에머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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