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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니 Dec 16. 2023

아이에게는 친절한 어른이 필요하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문해력이 한참 이슈였는데 이젠 공부정서, 공부감정이라는 말에 관심이 높다. 즐겁지 않은 일을 억지로 오래 할 수 없듯이 적어도 대입까지 12년 동안 공부를 해야 하는 아이들이 지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하기 위해서는 좋은 공부정서를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타고난 지적호기심이나 성취욕으로 인한 내적동기로 공부를 지속하면 좋겠지만 아직 어린 초등학생들이 내적동기로만 공부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이가 저학년일수록 공부정서를 헤치지 않는 본질적인 공부가 중요하다. 초3이 ar. 몇 점대의 원서를 읽는지 일주일에 영어단어를 몇 개나 외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친절한 어른이 곁에 있는가이다. 아이와 잘 놀아주고 옆에서 칭찬해 주는 자상한 어른이 공부정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엄마 나도 친구들처럼 영어학원에 가고 싶어. 학원 가서 영어 더 잘하고 싶어." 평소에 좋아하는 영화나 영상을 영어로 보던 사랑이가 학원에 가고 싶다고 했다. 영어책과 영어노래를 즐기던 사랑이는 다행히 영어감정이 좋은 상태였다. 아이와 영어학원투어를 시작했다. 집 근처에 갈 수 있는 영어학원이 3곳 정도 있었다. 원어민이 수업해 주는 A학원, 공부량이 많고 레벨이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B학원,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인 원장님이 혼자 수업하시는 작은 C교습소. 원비를 내는 엄마의 마음에는 가성비 좋은 B학원이 가장 마음에 들었지만 사랑이는 마지막으로 상담했던 작은 C교습소를 선택했다. 이유는 선생님 때문이었다. 고작 30분 상담을 하는 동안에도 선생님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에 감탄했다. 상담하는 동안 나의 첫 영어선생님이었던 스티브가 떠올랐다.


출처 픽사베이


고3 때까지 성적표 한 번 보여달라고 하신 적 없는 엄마가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인 나를 영어학원에 등록시켰다. (엄마도 어쩌다가 영어학원에 보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으신다고 한다.) 뱃속에서부터 영어를 듣고 태어나는 요즘 아이들은 믿기 힘들겠지만 그때는 중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알파벳을 배웠었다. 그러니 당연히 알파벳도 모르고 영어소리라는 건 거의 들어보지 못한 채로 영어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수업 첫날, 미지의 세계에 들어가듯 바짝 긴장한 채 교실로 들어간 나를 반겨준 건 키 196cm에 발사이즈가 310mm나 되는 캐나다인 STEVE였다. 선생님은 걸리버여행기에 나오는 거인처럼 무섭고 낯설었다. 게다가 스티브가 할 줄 아는 한국어는 고작 안녕과 고마워뿐이었고, 내가 겨우 들어본 영어라고는 Hi와 Thank you 뿐이었다. "안-녕? Hi~" 선생님은 매번 웃음 가득한 얼굴로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지만 생경하고 무서운 마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학원에 다닌 지 2주째 되던 날, 수업이 끝나고 가방을 챙겨 나오는데 선생님이 종이 한 장을 건네주셨다. 거기에는 함빡 웃음을 머금은 못생긴 내가 그려져 있었다. 8살인 내 동생이 그렸다고 해도 믿을만한 그림 실력에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입술에 힘을 잔뜩 주던 기억이 생생하다.



38살의 나는 영어를 잘하진 못해도 좋아한다. 더 잘하고 싶고 꾸준히 배우고 싶은 것 중 하나이다. 만약 친절한 어른인 스티브를 만나지 않았다면 과연 지금까지 영어를 좋아할 수 있었을까. 긴장한 탓에 2주간 입도 떼지 못한 나를 다그치며 말하기를 강요했다면 아마 영포자의 길을 걷지 않았을까 싶다. 사랑이는 1년째 C영어교습소에서 즐겁게 공부 중이다. RUCY선생님이 너무 좋다며 집에 있는 간식도 챙겨가고 가끔씩 편지도 써드린다.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는 학원인데도 여름볕이 뜨겁든 겨울바람이 차든 가기 싫다고 한 적이 없다. 친절한 선생님덕에 영어감정을 헤치지 않고 오히려 영어를 더욱 좋아하며 열심히다. 고학년이 될수록 공부량도 많아지고 어려워지겠지만 지금 쌓은 좋은 영어감정을 유지하며 이겨내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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