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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아 Apr 09. 2019

크고 작은 하루 1일째,
신발이 관광객

꼬박 30시간이 걸렸다. 연남동에서 출발해 바이마르에 도착하기까지. 직항을 타고 오면 15시간이면 됐을 길을 조금 더 싸게 오겠다며 딱 두 배 더 걸려서 왔던 거다.

동방항공을 타고 왔다.
기내식 사육도 당했다.

"독일 첫인상이 어땠어요?"

아람의 남자 친구가 물었다. 음, 어땠더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 건 새벽 5시 40분. 기차역으로 가기 위해 공항 밖으로 아침 6시쯤 나왔는데 동이 어스름하게 트는 걸 보며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여기 완전 제조업 도시야.' 빛을 들지 않은 도시는 회색으로 가득했다. 마치 방금 막 공장에서 나온 스테인리스 같다고 생각했다. 금방이라도 미래로 달려갈 것 같은 커다란 회색 ICE 기차는 나의 생각에 확신을 더해줬다.

드레스덴으로 가는 ICE 기차
제조업 도시 같다고 생각한 면모들

프랑크푸르트에서 바이마르까지는 기차로 3시간. 중간에 Erfurt(에르푸르트)라는 곳에서 갈아타야 한다. 감사하게도 자리는 많았고, 인터넷은 예상보다 괜찮았다. 탁자가 있는 곳에 자리를 펴고 일을 시작했다. 몇몇 사람들이 독어로 무언가 물어봤지만 대답을 원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나는 영어로, 상대방은 독어로 이야기하며 몇 가지 의사소통을 했다.(그 옆이 제 자리라 들어가야 하는데요. 제가 짐을 다리 밑에 두고 싶은데 잠시만 비켜주실래요 같은... 추측이다.)


모니터에 얼굴을 박은 지 15분쯤 됐으려나. 원래 ktx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일하는 나인데, 집중하기 너무 힘들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이 예뻤다. 알록달록한 지붕을 가진 집들, 빨간 기차, 푸른 녹지, 군데군데 베를린을 떠올리게 하는 그라피티까지. 이제야 실감이 났다. '와, 나 유럽에 왔네!'

바이마 중앙역. 와 나 유럽에 왔네!

바이마에 도착해 아람의 집에 잠시 짐을 풀고, 후다닥 옷만 갈아입은 후 다시 점심 먹으러 나가는 길. 바이마에서 공부하는 학생처럼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사람들의 눈길이 나에게 꽂혔다. "아직도 제가 관광객 같나요?" 이미 아람의 집까지 내 키만 한 캐리어를 들고 오면서 호기심의 눈초리를 많이 받은 후였다. 옷차림을 슬쩍 살펴본 아람은 단번에 대답했다. "신발이 관광객인데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오돌토돌한 돌길에 구두를 신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걸을 때마다 굽이 돌에 부딪혀 챙챙 소리를 냈다.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이 정도 티 나는 건 나쁘지 않은데?' 바쁘게 돌아다니면 하루 만에 대강 둘러볼 수 있는 도시였다. 아직은 낯선 눈으로 이 도시를 바라보고 싶었다.

그렇게 굽이 낮은 구두를 신고, 한 손엔 필카를 들고, 가방은 앞으로 맨 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바이마르를 쏘다녔다. 길을 걷다 기쁨에 겨워 춤을 추기도 했다. 누가 봐도 나는 이곳에 놀러 온 관광객이었을 테고, 일상을 벗어난 내 얼굴에는 여행자 특유의 미묘한 웃음기가 늘 서려 있었을 거다.


누군가 그랬다. 어느 도시에서건 하루에 10만 원씩 쓰면서 살면 행복하지 않겠냐고. 여행이 좋은 이유는 일상에 있을 때보다 아낌없이 돈을 쓸 수 있어서가 아니겠냐고. 지금 나는 그 사람에게 가서 땡이라고 말해 주고 싶다. 그저 낯선 곳에 이방인으로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여행이 좋을 수도 있다고. 그 낯섬을 즐기기 위해 가끔 배낭을 들쳐 메고 여행을 떠나는 거라고.


바이마르 첫날 구입 내역

1 스타벅스 베지... 베이글+아메리카노 7.05 EUR

2 편도 버스 티켓 한 장 2.10 EUR Einmal Einzelkarte bitte

3 점심은 아람과 아람의 남자 친구가 사주었다: 피자 + 바이젠

4 저녁 먹으려고 잔뜩 장을 봤는데, 이번엔 아람이 내고 다음엔 내가 내기로 했다.

5 맥주 2병. 2.05 EUR

시차 적응+독일에 도착할 때까지 제대로 못 자는 바람에 일찍 자느라 아직 못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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