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와서 특별한 경험을 꼽으라면, 난 망설임 없이 아람의 친구들을 만났던 일을 이야기할 거다. 그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1) 원래도 낯을 가리는데 영어로 말을 하는 상황은 더더욱이나 쑥스럽고 2) 미술을 공부하는 학생들과 뭔가의 공통점이나 접점 없이 이야기해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면, 나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초등학교 때였나, 미술 수업에서 0점을 맞은 적이 있었다. 아마 돌이켜 보면 그때 그렸던 그림이 마음에 안 들어 아예 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떤 초등학교 선생님이 0점을 주겠어...) 하지만 그 기억은 왜곡돼서 '난 미술에서 0점을 받은 아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생겼고 그림을 그려야 하는 상황에 꽤나 스트레스를 받아왔던 거다.
여하튼 바이마르로 온 지 10일째, 난 아람의 아주 많은 학과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점심에는 아람의 친구를 초대해 함께 음식을 먹었고, 저녁에는 어딘가 드넓은 벌판 같은 곳에서 생일 파티가 있어 참석할 기회를 얻었다. 다행히 교환학생을 갔던 5년 전보다 영어 실력도, 자신감도 조금 더 늘어 한마디도 하지 않는 어색한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그날 참 인상 깊었던 장면이 두 개 정도 있었는데,
하나는 바로 친구를 초대해 음식을 해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친구를 집으로 초대하는 걸 좋아한다. 무언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가 우리 집에 있는 장면을 보면 '약간 믿기지 않는 기분'이 종종 든다. 그렇지 않은 날에는 주로 음악이나 라디오, 혹은 의미 없는 tv 프로그램을 틀어놓는데 적막을 도저히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친구들은 남의 집에 간다는 게 썩 어색한 모양이다. '가자!'라고 하지만 정작 발걸음을 떼는 이는 많지 않다. 어쩌면 우리 집이 역과는 참 먼, 연남동 구석자리에 있어서일지도. 그래서 독일에서는 친구들을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는 게 일반적이라는 이야기가 어찌나 낭만적으로 들리던지.
아람과 그의 친구, 아샤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스치는 장면들을 눈에 담았다. 한쪽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큰 창 너머로 들어오는 햇빛, 음식과 커피가 차례로 올라간 테이블. 이사를 간다면 꼭 4인용 테이블을 사야겠다고 그곳에서 나와 소중한 사람들을 위한 음식을, 차를, 글을 만들고 찌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른 장면은 생일 파티 그 자체.
시내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소시지나 파인애플, 감자 따위를 구워 먹었다. 사방이 다 푸른데 불은 빨갛게 타오르고, 그 주변에서 사람들은 담소를 나누고, 지평선 너머로 석양은 지고.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풍경이었기 때문일까. 아직도 그날의 냄새가, 소리가, 풍경이 마음에 선하다.
아람과 집에 돌아와 라면을 끓여먹었다. 아, 그날 낮과 저녁의 사이에도 아람은 팬케이크를 만들어 주었다. 10일째를 쓰는 지금은 사실 17일째, 돌아갈 날이 머지않았고 이제 사진을 보지 않으면 우리가 어떤 날을 보냈는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벌써 조금씩 가물가물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