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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유 Apr 07. 2024

집어등에 달려드는 오징어처럼

2부 엄마독립시키기

5시 5분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해가 뜨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 창문을 열어 탁한 공기를 순환시킨다. 하얀 입김이 따라 나왔다. 몸이 부르르 떨리고 닭살이 돋았다. 주말에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생겼다. 6개월 동안 입고 다닌 옷을 빨았다. 팡팡 털어서 건조대에 널었다. 진공 백 속에 잠들어 있던 겨울옷을 꺼냈다. 부드러운 꽃향기가 올라왔다. 계절과는 맞지 않은 향기에 이질감이 들었다. 이 계절에 맞는 냄새가 무엇일까? 호떡과 붕어빵 굽는 냄새. 하얀 김 올라오는 어묵 국물일까?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여름옷을 가져다 놓으며 말했다. “우리 다시 6개월 후에 만나자.” 서랍 속에 차곡차곡 자리 잡았다. 그 옆에 유행이 한참 지난 옷과 신발에 눈길이 멈췄다. 순식간에 15년 전 고등학생으로 돌아갔다.


고등학교 2학년 어머니의 일탈을 알게 되었다. 따뜻하고 안락한 집은 사라졌다. 색조 화장과 향수가 진해졌다. 깨진 유리창 사이로 찬 바람이 들이닥쳤다. 쌀 포대 속에는 바구미가 꿈틀거렸다. 냉장고에는 골마지 핀 김치뿐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갈빗집 주방으로 출근했다. 시간당 3,200원을 받았다. 그곳에서 검게 눌은 불판을 닦고 쓰레기를 치웠다. 집에 돌아가는 밤이었다. 갈라진 손등 사이로 겨울바람이 파고들었다. 붉게 맺힌 피를 쭉 빨았다.


주말 아침에는 항상 빨래했다. 오후에는 옷을 걷어 다림질했다. 분무기로 물을 뿌려 와이셔츠 잔주름을 지웠다. 카라와 바지 앞 주름은 꾹 눌러서 날을 세웠다. 누렇게 색이 변한 티셔츠는 락스에 담가 희게 바꿨다. 늘어난 목에는 풀을 먹였다. 다림질해서 옷을 입으면 항상 새 옷 같았다. 가끔 소매 끝단이 풀려 거미줄처럼 하늘거렸다. 그곳에는 서러움이 매달려 있었다. 허겁지겁 실을 밀어 넣었다. 집에 돌아와 쪽가위로 잘랐다. 옷과 비슷한 실로 바느질했다.


동부시장 좌판에서 파는 옷이 싫었다. 엉덩이에 빨간 탭이 붙어있는 청바지를 입고 싶었다. 순백색의 가죽 신발을 신고 싶었다. 나는 동부시장에서 콩나물 천 원어치를 샀다. 찬물에 반투명한 콩 껍질을 씻었다. 반은 삶아서 무침을 만들었다. 나머지는 골마지 핀 김치를 넣어 국을 끓였다. 이런 삶에서 교복 이외의 옷은 사치였다.


고등학교 2학년 기말고사 때 신기한 경험을 했다. 시험지에서 답이 두둥실 떠올랐다. 그대로 OMR카드에 옮기고 성적표를 받았다. 내 위로 아무도 없었다. 아르바이트와 장학금으로 백만 원을 모았다. 통장에 숫자를 볼 때면 먹지 않아도 배불렀다. 불판을 닦아도 허리가 아프지 않았다. 허파에 구멍 난 것처럼 방실방실 웃었다. 집어등에 홀린 오징어처럼 일요일 오후 로데오 거리로 나갔다. 눈길도 주지 않던 매장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른쪽 가슴에 빨간 탭이 달린 오리털 파카를 샀다. 그 옆에서 조던 화를 샀다. 쇼핑백에는 나를 위한 선물이 들어있었다.


파카와 신발은 살 때만 행복했다. 어깨가 눌릴까 봐 가방을 들고 다녔다. 진창을 밟을까 봐 땅만 보고 걸었다. 줄어든 통장은 마음을 얼어붙게 했다. 옷을 입으면 목을 조여왔다. 신발을 신을 때 발볼이 아팠다. 겨우내 옷걸이와 신발장에서 자리만 지켰다. 15년째 빨간 탭 오리털 파카와 조던 화를 입지 못했다.

결핍과 열등감은 나에게 강한 동기를 부여했다. 성장하는 에너지가 되었다. 열심히 페달질할 목표를 만들어 주었다. 다만 소유에 대한 결핍은, 내 삶을 뒤틀고 왜곡시켰다. 나를 집어등에 달려드는 오징어로 만들었다. 새 옷과 신발을 신으면 다른 사람이 될 것 같았지만, 어떤 것도 변하지 않았다. 달라진 건 통장 잔액뿐이었다. 지금도 음식과 돈을 생각하면 시야가 좁아진다. 배가 불러도 단추를 풀고 더 먹었다. 감기에 걸렸지만, 토요일에도 일했다.


‘내게 부족한 게 무엇이고 어떤 걸 하고 싶었을까?’ 질문했다. 나에게 에너지를 쓰고 싶었다. 시간이 빨리 가고 만남이 기다려지는 일을 하고 싶었다. 사이버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해 공부했다. 독서 모임에 참가해 의견을 나눴다. 물건을 살 때보다 사용하며 기분 좋은 것을 구매했다. 가끔 명품이 하나도 없냐는 질문을 받는다. 편안하지 않아서라고 대답한다. 나와 맞지 않은 오리털 파카와 신발로 느껴봤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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