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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유 Apr 14. 2024

카타르시스

2부 엄마독립시키기

숨겨 놓았던 트라우마가 깨어났다. 현실과 동떨어진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영화 5 to 7 서평을 읽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24살 작가 지망생 브라이언. 33살 유부녀 아리엘. 뉴욕 센트럴파크의 한정된 공간과 시간. 우연으로 시작된 성냥불 같은 일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현실에서 한 번쯤 꿈꿔봤을 이야기가 펼쳐졌다. 자신을 주인공으로 빙의해 감정과 생각을 풀어냈다. 비현실감을 지속해서 느끼고 있을 때, 세상이 분리된 것처럼 느껴졌다.

  

“엄마 말만 해 원하는 최신 핸드폰으로 바꿔줄게”

그날도 별다른 것 없는 일요일이었다. 원하는 기종과 색상의 휴대전화를 선택했다. 신청서를 작성하고 본인인증의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지진이 난 것처럼 액정이 흔들렸다. 메시지 아래 저장되지 않은 번호가 있었다. “언제나 보고 싶고 내 품에 안고 살고 싶어라..” 중년 아저씨 같은 말투로 사랑을 속삭이는 문자메시지. 대장간 화덕에서 나온 쇳덩이처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관자놀이에 핏줄이 서고 터질 것 같았다. 오른쪽 뺨을 한 대 갈겼다. 증발했던 이성이 조금 차올랐다. 엄마 번호를 네이트온에 연동했다. 그 순간이었다. 방으로 향하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벼락이 내리꽂는 찰나의 시간이었다. 미처 지우지 못한 문자메시지는 사진을 찍었다. 모든 일을 끝마치자, 얼굴이 창백해졌다. 볼에는 빨갛게 손바닥 자국이 남았다. 손에 있던 휴대전화를 잽싸게 낚아챘다. 그리곤 무슨 일 있냐며 태연하게 물었다. 모기를 잡다가 실수했다고 얼버무렸다.     


그날 이후로 컴퓨터를 끄지 못했다. 집에 돌아오면 가장 먼저 모니터를 켰다. 엄마에게 도착한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 주말이면 자동차 수리한다는 핑계로 차 키를 받았다. 블랙박스 영상을 빼서 저장했다. 한 달쯤 자료를 모아서 분석했다. 짝수주 토요일 특근을 핑계로 집을 나갔다. 회사 유니폼을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한껏 치장하고 상간남을 만났다.  머리를 쥐어뜯었다. 누구에게 고민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몇 날 며칠을 밤새워 고민했다. 엄마와 독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아빠는 몰라. 그러니까 그만하고 돌아와 엄마.”

두 손을 싹싹 빌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한번 실수였고 일탈이라 말했다. 일시적인 평화가 찾아왔다. 대문과 창문은 굳게 닫혀있었는데, 한기가 안개처럼 밀려 들어왔다. 손발에서 땀이 나고 몸에서 열이 났다. 다시 같은 일이 벌어질까 봐 두려웠다. 매일 컴퓨터로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 블랙박스 영상을 돌려봤다.

‘개가 똥을 끊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다시 연락을 시작했다. 이제는 주말이 아니라 평일에 만났다. 실낱같던 희망이 툭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용광로 속 쇳물처럼 몸과 마음이 펄펄 끓었다. 이런 내 의지를 모텔주인은 꺾을 수 없었다. 상간남이 있는 방문을 열었다.

. 엄마와 나는 서로를 바라봤다.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주의 깊게 바라보지 않았다.

  

‘엄마는 가장이니까 이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한 장의 깨진 유리창을 방치하면 그곳을 중심으로 범죄가 시작된다는 이론이 떠올랐다.

‘엄마의 마음속 유리창은 언제부터 깨져 있던 걸까?’

‘내가 너무 늦게 알아차린 게 아닐까?’

‘아빠랑 나를 버리고 새살림을 차리면 어떻게 하지?’

‘지금부터 내가 더 잘하면 되지 않을까?’

불확실성이 생기자, 감정의 파국이 들이닥쳤다. 내면에 질문을 던지고 답을 했다. 이런 과정에서 점점 더 부정적인 결과를 예상했다. 어느 순간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했다. 진짜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몸과 마음을 잠식했다. 예측할 수 없는 삶의 고통을 끌어안고 스스로 유황불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에 카타르시스란 말이 있다. 비극을 통해 마음을 정화한다. 간접 체험을 통해 슬픔에 내성을 기른다. 백신을 맞아 항체를 형성하듯 말이다. 현실의 고통스러운 부분. 감추려는 슬픔을 외면하면 안 된다. 그것을 통해 조금 더 성숙하고 강해져야 한다. 아직 엄마의 외도 상처를 극복하지 못했다. 치부를 지우려 했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리했다. 내 일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며 잊어버렸다.     


언젠가는 영화 5 to 7을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싶다. 다른 사람처럼 24살 브라이언에게 동화되기를 희망한다. 그때가 되면 속에 있는 묵을 때를 불로 태우고 싶다. 카타르시스를 통해 깨끗하고 가벼워진 나를, 온전히 환대하는 때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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