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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유 May 19. 2024

이부동생이 생겼다

2부 엄마독립시키기

이분법적 사고가 생겼다. 세상에는 먹을 수 있는 풀. 먹지 못하는 풀이 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 혼자 살게 된다면, 절대 식물은 키우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이 다짐이 와장창 깨어졌다.

“현수야, 네 집인데 플랜테리어 해야지”

고등학교 3학년 은사님의 생각이었다. 겨울에 보일러를 잘 틀지 않는다는 핑계도 통하지 않았다. 택배로 보내주신 식물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 한 달 만에 죽었다. 이게 끝인 줄 알았다. 은사님을 찾아뵙고 집에 가려고 할 때였다. 자동차 뒷자리에 화분을 옮겨 놓으셨다.

“이번에는 죽이지 말고 잘 키워”

매주 일요일 아침. 화분에 물을 주며 온도와 습도를 관리하던 그때가 기억났다.    

 

노는 토요일 아침이었다. 나는 빨래를 돌리고 화장실 청소하고 있었다. 엄마는 자야 할 시간에 일어났다. 의아해하는 내 눈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화장대에서 머리를 다듬고, 분을 칠하고 집을 나섰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에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잠시 한숨 돌리고 있을 때, 누군가 현관문을 쾅쾅 두드렸다. 그 사람이었다. 헐레벌떡 일어나 자물쇠를 열었다. 그는 양팔로 화분을 소중하게 감싸 안고 있었다. 나는 그것에 눈을 떼지 못했다. 아기 얼굴만 한 보라색 덩어리.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끝이 휘어진 잎사귀 가장자리는 그림자를 찢는 마녀의 손톱이었다. 주변의 생명력을 빨아먹고 성장하는 게 아닐까? 환상을 느끼고 있을 때. 그가 내 등을 치며 말했다.

“트렁크에 짐 있어.”

키를 건네고 방으로 향했다. 차에는 소포장 된 흙과 식물 영양제. 색색의 작은 조약돌. 작은 화분 여러 개가 있었다. 짐을 들고 들어가자, 그는 발코니 문을 활짝 열고 내게 손짓했다.

“비싼 건데 할인해서 삼십만 원 주고 샀어! 한 시간 동안 고민했다니까?”

내가 한 달간 아르바이트해도 벌지 못하는 돈. 그에게 생활비를 말하면 항상 차일피일 뒤로 미뤘다.

“보너스 나오면 보내줄게. 우선 너 돈으로 먼저 써”

알면서도 속았다. 그도 힘들 테니까. 그런데 관상용 식물에 목돈을 쓰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이튿날부터 그는 나를 붙잡고 설명했다. 물은 한 달에 한 번. 흙이 촉촉할 정도만 줄 것. 습하면 깍지벌레, 곰팡이가 생기니 자주 환기 할 것. 마지막으로 동생처럼 잘 챙기라고 말했다. 졸지에 팔자에도 없던 이부동생이 생겼다. 그가 화원 문턱을 넘나들 때마다 동생이 늘어났다. 서비스로 받았다며 한 개. 할인해서 한 개. 그것은 시간이 지나도 징그럽기 짝이 없었다.     


그는 아침저녁 발코니로 가서 다육식물을 관찰했다. 화분 하나하나 이름으로 불렀다. 그때 생각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내 이름을 부른 게 언제였을까?’

내 눈에 다육식물은 돈과 사랑을 빨아먹는 괴물처럼 보였다. 그때부터, 타인의 감정을 주의 깊게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육식물과 나를 보 는 눈빛이 달랐다. 행복해서 꿀이 떨어지는 사랑의 감정은 진심이었다. 멀리서 그를 관찰하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적도의 온화함에서, 싸늘한 남극으로 바뀌었다. 혐오과 멸시. 메두사와 마주한 페르세우스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괴물에게 발코니를 빼앗겼다. 그늘진 곳에 새워진 건조대. 빨래는 일주일에 두 번 널었다. 선풍기 타이머를 4시간으로 맞췄다.

“킁킁-”

쉰내가 나지 않을까? 코를 박았다. 나에게 눈그늘이 생겼다. 볕이 드는 발코니로 향했다. 따뜻한 햇볕에서 비린내가 났다. 종묘사에 가서 농약을 사고 싶었다. 분무기에 넣어서 뿌리면 금방 말라죽을 텐데. 하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다. 저 괴물이 죽는다면. 그에게 나도 말라죽을 것 같았다. 그때는 그랬다. 괴물이 살아야, 나도 살 수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화분에 물을 준다. 하나는 죽었다. 과한 습도로 뿌리가 썩었거나, 너무 낮은 온도가 원인이었겠지.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았던 것. 집에 들어온 순서로 불렀다. 1호는 범접할 수 없게 커졌다. 2호는 여름에 만개하고 겨울에 작아졌다. 3호는 숲을 이뤘다. 4호는 꽃을 피웠다. 5호는 파랗게 말라죽었다. 가까이서 자세히 보지도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지나가며 살아는 있구나. 하는 정도. 어느 순간부터, 삶에서 의도에 따라 실현되는 것은 오직 이것뿐임을 깨달았다. 오롯이 내가 물을 주면 살고. 주지 않으면 서서히 죽어가는 식물. 그도 같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미래를 기댈 수 있게 자식을 잘 키웠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순응하지 않았다. 자꾸만 어긋나고 일탈해서, 제어되지 않을 때 얻어지는 무력감, 해서 다육식물에 더 애정을 쏟은 게 아닐까?     


미래를 아무리 준비해도, 삶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식물은 다르다. 내가 물을 주고 햇볕을 쐬어주는 만큼 정직하게 자란다. 유일하게 내 뜻대로 되는 것. 사랑을 준 만큼 돌아오는 피드백. 분갈이를 하며 이만큼 자랐구나 확인하는 뿌듯함. 그 역시 나와 비슷한 감정을 품고. 다육식물을 가꾸며 위안을 찾았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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