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나오던 사람과 어깨가 부딪치며 책이 바닥에 쏟아졌다. 순간 부정적인 감정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그런데 맞은편 사람의 얼굴을 보자 말문이 막혔다. 쫓기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와 눈그늘. 푸석한 피부와 축 처진 어깨. 망연자실한 표정. 당장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어트릴 것 같았다. 나는 말없이 바닥에 뒤섞인 책을 정리했다. 하나같이 자기 계발서였다. 시간, 돈, 목표를 설정하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책.
‘학생 때 정말 많이 읽었는데.’
가방에서 초코바 하나를 꺼내 책 위에 올려서 건넸다. 멀뚱히 간식을 보던 그는 가볍게 목인사를 하고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삶이 답답하고 억울하고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나도 자기 계발서를 읽었다. 글쓴이가 이야기한 방향으로 나의 역량을 키웠다. 삶의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찾으려 읽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기획으로 출간된 도서. 내용은 비슷했다. 하지만 본받을 어른과 친구가 없던 내게,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어느 순간 용돈이 끊겼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당시 엄마는 이상한 말을 자주 했다.
“공부할 필요 없어. 기술 배워서 빨리 돈 벌어.”
보통의 부모라면 하지 않을 이야기. 확고한 자아가 구성되지 않았던 때. 무조건 그의 말이 옳았고, 순종했다. 내가 참아야지 집이 화목해진다고 생각했다. 그때 주변 사람들은 비슷한 말을 했다.
“쯧쯧 공부에는 다 때가 있는데.”
처음에는 듣고 넘겼다. 하지만 나이 성별에 상관없이 모두가 비슷한 말을 했다. 그때마다 헛갈렸다. 집에서 듣는 그의 말. 밖에서 만나는 타인의 말. 상반되는 이야기에 머릿속이 혼탁해졌다. 그때마다 나는 도서관에 가서 자기 계발서를 찾았다.
“아침형 인간이 되어라.”
새벽부터 일어나 씻고 준비해 학교에 갔다. 맑은 정신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작은 성공의 경험을 느껴라.”
일상의 루틴을 유지했다. 아르바이트를 10분 일찍 출근해 준비했다.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공부했다. 나에게 자기 계발서는 삶에 마지막으로 남은 지푸라기였다.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
그의 보살핌 속에서 살고 싶었다. 하지만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말을 뱉었다. 그는 고삐를 쥐고 내게 명령했다.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결정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코뚜레가 걸린 소처럼 그의 의견에 따랐지만, 마음속에서 의문이 피어났다. 삼자의 관점에서 그와 나의 관계를 바라봤다. 말과 행동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내가 성장하려고 애쓸 때마다,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나에게 잘못된 선택을 종용하고 있었다. 현실을 직시하자 그와의 관계가 생경하게 다가왔다. 내가 읽은 책 속의 저자. 아르바이트하며 관찰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지 않았다.
“네 마음대로 하고 싶으면 나가서 살아.”
독립하고 싶었다. 하지만 미성년자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었다. 그는 내 자존감을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끝나지 않은 롤러코스터의 무중력을 느끼고 있을 때. 일관되지 않은 태도에 내 정신이 아득해졌다.
“너는 혼자 살아갈 수 없어. 엄마한테 그런 행동하면 안 돼.”
상식을 뒤트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생각하지 말고 의존하라는 것 같았다. 나는 타인을 관찰하며 삶을 배우고 있었다. 더 이상 논리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따르지 않았다. 내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그것을 왜 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 선택했다. 이유가 중요해지자 그의 말에 복종하지 않았다. 그러자 화를 냈다. 나의 주체를 지우고 길들이려 애썼다. 마치 마네킹을 만들려는 것 같았다. 생각과 의지를 빼앗고, 의사결정과 주체성에 개입하며 그의 판단이 옳다고 강요했다. 이것을 부모의 희생이라 포장했다.
세상의 중심이었던 그를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광활한 삶 속에서 타인을 보고 본받았다. 이것을 자기 효능감(Bandura)이라 말한다. 교육으로 배우는 게 아니다. 사람을 관찰하고, 책을 통해 간접경험을 한다. 이것으로 인생의 과제에 대처하는 기술을 익힌다. 나는 작은 성공의 경험을 쌓았고, 잘할 수 있다는 경험에 근거한 믿음을 만들었다. 이것이 내가 하고 싶다는 동기를 끌어냈다.
나의 뿌리를 만든 그의 영향은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반쪽짜리 사랑을. 책과, 좋은 선생님. 직장동료를 통해서 채웠다. 그의 혼미한 애정과 달랐다. 안정적이고 믿을 수 있는 응원은,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란 걸 알려주었다. 비록 가정은 화목하지 않지만, 세상은 믿을 만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나를 의존할 수밖에 없는. 모자란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삶은 그를 의지하라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나를 쫓아오던 자기 의심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