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쭈그려 앉아 줄지어 가는 개미를 보고 배시시 웃었다. 갑자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까르르 웃으며 제자리에서 뜀박질했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동그란 눈망울을 깜빡이며 “안녕하세요.” 인사했다. 나도 따라 인사하며 목구멍에서 튀어 오르는 “착하네”라는 말을 삼켰다. 지금 ‘착하다고 말하는 게 맞는 걸까?’ 재빠르게 “먼저 인사해 줘서 고마워.” 주머니에 있던 막대사탕을 전했다. 아이는 허리를 숙여 꾸벅 인사하고, 책가방을 들썩이며 건널목을 뛰어갔다. 외부 세계를 접하며 자아를 구축해 나가는 시기. 관심과 인정 욕구가 강할 때. 타인의 “착하네”라는 칭찬은 아이의 삶을 뒤틀어 버릴 수 있다.
오래전에 엄마에게 자주 들었던 말이다. 그는 내가 감정을 삼키면 한결같이 “착하네”라고 말했다. 마트에서 내 눈에 변신 로봇 장난감이 들어왔다. 엄마의 소맷귀를 끌어당겼다. 그때도 그는 “착하지? 집에 가자. 다음에 사줄게.”로 일관했다. 어느 순간 내 감정은 “착하다.”에 목줄이 채워졌다. 그의 욕망을 만족시키게 길들었다. “착하다. 순하다. 기특하다.” 뭉툭한 칭찬은 내 삶을 뒤틀어 버렸다. 감정을 억누르고 버티는 게 당연해졌다. 보상으로 그의 짧은 말 한마디. 그것에 집착해 착한 아이가 되려고 매진했다. 어느 순간 그가 없어도 피어오르는 감정을 삼켰다. 가지고 싶고 먹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때마다 현실에 없는 그가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우리 아들 착하네.’ 참고, 기다리고, 인내하는 것. 이것이 삶의 방식이 되었다. 늘어나지 않은 목줄은 나를 애어른으로 바꿔놓았다. 그의 품에 안겨 어리광과 애교를 부리지 못했다. 내가 원하는 것. 욕망을 표현하지 못했다. 더 나아가 가지고 싶다는 욕구를 나쁘게 생각했다. 그는 자유를 억압했고, 반복된 실망으로 유순하게 만들었다. 나의 욕망은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버렸다. 이렇게 파묻힌 수많은 감정이 레몬으로 자라났다.
부모의 무한한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사람이 부러웠다.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들을 향한 사랑은 따뜻한 햇볕으로. 관심은 촉촉한 비가 되어 마음을 적셨다. 욕구는 무럭무럭 자라 열매가 맺혔다. 감정과 추억으로 살 찌운 과일. 새콤달콤한 향기를 뿜고, 한입 베어 물면 과즙이 볼을 적셨다. 그런데 내 가슴속에는 작고 볼품없는 샛노란 레몬으로 가득했다. 껍질을 까서 한입 베어 물면 딱딱한 씨가 있었다. 입으로 들어온 과즙은 너무 시었다. 가끔 구석에 있던 레몬 하나가 곪고 썩었다. 큰 아픔을 주는 급소, 열등감이 되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주눅 들기 일쑤였다. 맛도 없고 쓸모도 없는 레몬을 볼 때면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생겼다.
과거에 읽었던 김형경 작가의 「좋은 이별」 책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 내면에 깃든 묵은 상처를 치유하는 기능이 있다. 면도날 같은 기억도 외부로 표출되는 순간 종잇장처럼 변한다.” 아침에 일어나 모닝 페이지를 쓰기 시작했다. 육두문자를 쏟아냈다.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삶을 원망했다. 세상을 저주하고 탓하는 글을 썼다. 한 동안 쓴 글을 보자 공통점이 보였다. 오롯이 남 탓만 하고 있었다. 엄마 탓, 아빠 탓, 불우한 가정환경 탓. 내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었다. 과연 이게 가능할 일일까? 더불어 정말 행복하고 기쁘고 좋았던 일은 하나도 없었을까?
돋보기로 내 삶을 확대했다. 작고 사소하고 신경 쓰지 않으면 스쳐 지나갈 일을 주시했다. 퇴근 후 엘리베이터가 1층에 있어서 감사했다. 구내식당에서 갓 튀긴 따뜻한 돈가스를 받아서 감사했다. 어제 사 온 토마토와 사과가 너무 맛있어서 감사했다. 늦장을 부리다 통근버스를 놓친 것을 반성했다. 내 기분을 나쁘게 했다고, 친구에게 마음을 상하게 말한 것을 반성했다. 주말 내도록 책을 읽지 않고 휴대전화만 본 것을 반성했다. 매일 모닝 페이지, 감사 일기, 반성 일기를 적었다. 치유의 글쓰기를 통해 마음의 부정적인 감정을 덜어냈다.
이제는 가슴속 레몬을 요리하는 법을 배웠다. 편으로 썰어 물에 담가서 껍질에 쓴맛을 빼고, 설탕에 절여 레몬청을 담갔다. 씨를 발라내고 껍질째 설탕과 함께 졸여서 마멀레이드를 만든다. 아직도 떫고 신 레몬이 힘들게 하는 건 변함없다. 다만 이제는 산도 조절하는 법을 배웠다. 하이볼 글라스에 얼음을 넣고 위스키 45mL를 붓는다. 신선한 레몬즙 15mL를 넣고, 얼음에 닿지 않게 유리 벽면을 타고 탄산수를 조심스럽게 따른다. 얼음을 가볍게 위아래로 섞어서 위스키 하이볼을 완성한다. 맥주 대신 치킨 피자와 페어링 하거나, 단독으로 마셔도 깔끔하게 입안을 정리해 주는 하이볼이다.
“안녕하세요! 저와 함께 신선한 레몬즙을 넣은 위스키 하이볼 한잔 같이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