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유 Jun 23. 2024

이기적인 용서

2부 엄마독립시키기

모두가 싫어하는 황사에도 이로운 점이 있습니다. 모래바람 속에 섞여 있는 알칼리성 성분이 산성비를 중화합니다. 덕분에 토양과 호수의 산성화를 방지하고, 플랑크톤에 유기 염류를 제공합니다. 과거에 만났던 신X지 독서 모임이 생각났습니다. 그들과 함께하며 마음은 불편했지만, 고전문학 「데미안」 「싯다르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신곡」 「파우스트」 「동물농장」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었습니다. 호프집에서 뒤풀이 후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YOUNG VOICE 청년 강연콘테스트 광고를 접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스피치 대회에 지원했습니다. 버썩 얼어서 면접을 망쳤습니다. 이렇게 끝나는 줄 알았는데 운이 좋게 본선에 진출했습니다. 내게 주어진 일주일의 시간. 준비에 열과 성을 다했습니다. 스트레스 때문에 이명이 찾아왔지만 포기하지 않고 노력했습니다. 비대면 스피치대회 영상 촬영을 마치고 다음 날 충장로 전일빌딩 앞 청년 주관 무대에 올라 광주 시민 앞에서 나의 이야기를 풀었습니다. 준비한 PPT 슬라이드가 제대로 넘어가지 않는 사고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내 얘기는 올바르게 전했습니다. 무대에 서서 내 이야기해 보기. 하나의 버킷리스트를 이뤘습니다. 그러자 새로운 욕망이 샘솟았습니다. 고등학생 때 돈이 없어서 포기했던 문예창작학과에 도전해 보고 싶었습니다.

세종사이버대학 3학년 편입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체력 관리를 위해 음식을 줄이고 운동하며 잠자는 시간을 쪼개었습니다. 직장생활도 병행하고, 1년이 찰나의 시간처럼 지나갔습니다. 심리학도 배우고 싶어 졌습니다. 4학년 부전공으로 상담심리를 신청하고 수강했습니다. 매 순간 놀라움과 경의의 연속이었습니다. 심리학을 통해 깨달은 통찰을 에세이로 정리하며, 마음속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는 어린 나와 마주했습니다. 어떤 심정이었는지를 울고 있는 나에게 묻고 대답을 들었습니다. 내가 왜 그런 생각과 결정을 내렸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에세이 연재가 절정에 다다른 순간, 그런 행동을 했던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피해자였고, 또 가해자였습니다. 어머니도 외할아버지 할머니께 뒤틀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내게 어긋난 사랑을 전했습니다. 강원도 횡성군 5남매 중 장녀로 태어난 어머니. 학교는 항상 오전수업만 받고 집에 돌아와 동생을 돌보고 밭일을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공장에 취업해서 동생들의 학비를 마련했습니다. 셋째 장남과의 차별과 막냇동생에게 치우친 부모의 사랑과 관심은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열등감을 쑥쑥 키웠습니다. 제때 치유되지 못한 어머니의 상처와 아픔이 마음속에서 곪고 썩어서 저에게로 흘러왔습니다. 사랑 없이 시작한 결혼. ‘연애 한 번 제대로 못 해본 젊음이 아쉬워 외도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그의 마음에 다다르자, ‘엄마가 어떻게 자식에게 그럴 수 있지?’에 대한 답을 찾았습니다.


중학생 때 본 영화 에릭 브레스 감독의 「나비효과」(2004)에서 남자주인공(에반 트레본)은 연인(케일리 밀러)을 구하기 위해 시간여행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과거를 바꿔도 불행해지는 현재를 마주하는 주인공. 결국 엄마의 뱃속으로 돌아가 탯줄로 목을 감아 자살하며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갑니다. 저 또한 자식이 생긴다면 내가 혐오하는 부모처럼 아이를 핍박하고 착취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이상 같은 저주를 대물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심리학 강의와 에세이 연재를 통해 새로운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애착 대상에게 상처받은 사람이 나에게 아픔을 줬던 비슷한 유형의 사람을 다시 만나 고통을 받습니다. 혹은 내가 혐오했던 부모처럼 폭력을 행사하는 일. 알코올 중독에 빠지는 것. 이 모든 원흉은 부모에게 받은 상처를 봉합하지 못해서. 그들을 용서하지 못해서. 증오의 사슬이 대물림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어머니를 용서하려고 합니다. 그는 내가 용서하였는지 알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이것을 통해 내 마음에 있는 분노와 억울한 감정 끊어내려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음속에서는 ‘나한테 왜 그랬어?’라는 생각이 떠오르지만 용서하기로 한 결정을 두 손에 꼭 쥐고 있겠습니다. 이 판단을 절대 후회하지 않고 번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잘못을 용납하는 것을 넘어 어머니의 입장에 서서 공감하고 같은 마음을 가지고 받아들이겠습니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원한의 연결고리를 잘라낼 수 있습니다. 만약 삶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그 사람과의 아이가 생긴다면. 이것은 내가 어머니에게 받은 뒤틀린 사랑을 걸러낼 수 있는 유일한 필터가 될 것입니다.

이전 22화 어른이 되었으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