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힌 페이지
깊은 밤.
목도리를 두르고,
검은색 무언가를 입은 사람들이 지나간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무언가를 설명하지 않아도,
계절을 말하고 있었고
나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읽고, 느끼고, 생각하고 있었다.
[벌써 읽은 지 한 시간이나 지났네]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나는 어떤 기분에 휩싸여
미세하게 손을 떨고 있었다.
흰 책상 위에 올려진
톨스토이의 이야기.
'그것'을 죽음 직전까지
믿었던 이반 일리치의 이야기.
나는 절망과 죽음의 공포가 휩싸인
한 사람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절망은 소리 없이 번지고,
죽음은 언제나 예고 없이 가까워진다.
그때였다.
시야 한쪽에서 짙은 그림자가 흔들렸다.
원 투 원 투
주먹이 공기를 가르며 허공을 찼다.
[갑자기 뭐야]
나의 음성을 회피하듯이
좌우로 위빙 하는 정기원
'그냥 스트레칭 겸 해봤어'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기원이의 움직임은
이 공간과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이상할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조용한 카페
뜬금없는 그의 행동에
나는 반사적으로 책을 쥐며 말하려 했다.
정확히는, 말하고 있었다.
[이 책의 줄거리를 읽어줄 테니, 너의 생각을 말해볼래?]
'그래 좋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좋은 집안에 지혜롭고
인품까지 갖춘, 사람이다.
고위 판사라는 직업은
그를 설명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는 행복했다.
아니 행복했어야 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것'을 죽음 직전까지
믿어왔던 삶이 고통스러운지.
어느 날
입안에 설명할 수 없는 맛이 남았고,
옆구리에 통증이 자리 잡았다.
병원에서 마주한 의사의 얼굴은
그가 법정에서 보였을 표정과 닮아 있었다.
확신에 찬 얼굴.
의심하지 않는 얼굴.
그러나 처방은 효과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은 설명이 필요 없는 상태가 되었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의 삶은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여전히 그것을 할 수 있다.'
'그것'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죽음에 다다르기 직전
그는 깨달았다.
'그것은 없다.'
[자 여기까지 대충 이야기해 봤는데 어때?]
한참을 고민하던 기원이가
마른 입가에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대답했다.
'뭔가 대외적으로 성공된 삶을 살았던 사람 같아'
'내가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꼭 성공된 삶이 행복할까? 에 대한 생각이 드네'
기염을 토하듯 대답한 그는
이내 생각에 잠긴 듯
창문 밖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유리 넘어 세상은
여전히 검은색 무언가를
입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문밖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우리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이야기의 첫 장을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