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더릭 와이즈먼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감상평
1992년, 100년 역사를 자랑했던 보스니아 국립도서관이 보스니아 내전으로 인해 파괴되었다. 150만 권에 이르는 장서가 화염에 휩싸였고, 15만 권이 넘는 희귀본과 필사본이 소실되었다. 한 세기에 이르는 인류의 소중한 자산이 너무나도 쉽게 사라질 수 있는 나약한 실체였음이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유네스코는 지식과 지혜의 원천이자, 인류 경험의 전달자인 기록을 지키고자 '세계기록유산 프로젝트'를 주도하였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기록물이 반드시 '평화'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국가와 문화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온 지혜를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기록을 보존하는 것은 곧 평화를 도모하는 실천적 밑거름임이 분명하다.
여기 또 다른 시선으로 도서관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 지식의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곳으로서 도서관을 바라본, 다큐멘터리의 거장 프레더릭 와이즈먼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프레드릭 와이즈먼 감독은 50여 년간 학교, 주 의회, 발레단, 미술관 등 다양한 기관을 대상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해왔다고 한다. ‘뉴욕 라이브러리’는 와이즈먼 감독의 최신작으로, 뉴욕타임스 선정 ‘2017 최고의 영화’ 선정 및 제74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하는 등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나는 평소 책을 빌리고 공부하는 공간으로 사용하는 목적 이외에는 도서관의 기능과 혜택을 많이 누려보지 않았다. 이러한 나에게 도서관의 일거수일투족, 그것도 세계 5대 도서관으로 꼽히는 뉴욕 공립 도서관을 206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낱낱이 탐방할 기회가 주어졌다. 나를 포함해 영화를 관람한 모든 사람들에게는 적어도 도서관이라는 장소가 가질 수 있는 기능의 스펙트럼이 무한정 늘어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뉴욕 공립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보관하는 장소가 아니라 작가들과 독자들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을 시작으로 그림 컬렉션, 어린이와 장애인을 위한 프로그램, 취업 박람회, 예술 공연 등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영화는 장면이 바뀔 때마다 도서관의 새로운 민낯이 하나씩 드러나는 구조를 갖는다. 이와 동시에 뉴욕 공립 도서관의 직원들이 도서관의 운영과 관련하여 회의를 하는 장면들이 분량의 절반을 차지한다. 123년의 긴 역사를 가진 뉴욕 공립 도서관은 무려 92개에 달하는 분점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처럼 거대한 기관을 운영하는 직원들의 회의는 복잡해 보이지만 생각보다 단순하다. 1) 도서관은 지식이 필요한 사람이 오는 곳이며, 2) 시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협력해야 하는 곳이라는 두 가지 명제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노숙자들의 문제에 관해 회의를 할 때, 한 직원이 ‘노숙자가 무섭고 꺼려지는 존재이지만, 우리들 개개인의 편견이 아닌 도서관의 본분에서 노숙자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라고 말하던 장면이 인상 깊었다. 이 밖에도 한정된 예산으로 장서를 구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베스트셀러는 물론 많은 이용자들을 끌어올 수 있겠지만, 10년 후 사람들이 쉽게 얻을 수 없는 희귀 도서를 보관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라고 말한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다큐멘터리 영화의 특성이 그러하듯 도서관의 일상적인 모습을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어떠한 빛나는 명장면을 삽입하여 신성시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하고 일상적인 장면들이 모여서 도서관이라는 장소에 대한 의미와 성찰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좋았다. 영화 후기를 쓰는 와중에 뉴욕 공립 도서관이 인스타그램 플랫폼에서 고전 소설을 이미지와 콘텐츠로 제공하는 전자책 서비스를 새로 시도하고 있다는 글을 보았다. 인스타그램의 스토리 기능은 물론 15초마다 화면이 전환된다는 큰 제약을 갖고 있지만, 소셜미디어와 전자책 플랫폼이 공존할 수 있는지를 가늠해 본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실험이 될 것이라는 평이었다. 이러한 글을 접할 때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를 감상한 사람들은 적어도 그 뒤의 직원들의 노고를 같이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