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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지수 Sep 04. 2019

2019년 제83회 SAA 연례회의 참석

텍사스 오스틴에서

대학원 입학 전 선배로부터 『기록의 힘: 기억, 설명책임성, 사회정의(Archives Power: Memory, Accountability, and Social Justice)』라는 책을 선물 받은 적이 있다. 책의 저자는 아카이브를 둘러싼 방대한 사례와 은유들을 넘나들며 기록전문가의 사회적 윤리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비록 모든 내용을 소화하지는 못했으나, 아카이브라는 주제 하나로 이처럼 폭넓은 사회적, 문학적 소재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깊은 인상을 준 책이었다. 이 책의 저자 랜달 C. 지머슨이 한때 회장으로 활동했던 단체가 바로 미국아키비스트협회(SAA: Society of American Archivist)이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미국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동안 기회가 닿아 SAA 연례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사실 SAA 연례회의 이전에도 북미 컨퍼런스에 참석한 경험이 두 번 있다. 첫 번째는 3월 말 콜로라도 덴버에서 열린 CEAL(Council on East Asian Libraries) 컨퍼런스였고, 두 번째는 워싱턴 D.C.에서 개최된 ALA(American Library Association) 컨퍼런스였다. CEAL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동아시아학 관련 사서들과 연구자들이 주로 활동하는 단체이기에 대학도서관, 리서치도서관을 중심으로 세션이 구성된다. ALA는 이를 포함하여 공공도서관 등 북미 내 모든 유형의 도서관과, 이에 대한 이슈를 다루기 때문에 규모가 더욱 크다. SAA 컨퍼런스도 정부, 대학, 기업 아카이브뿐만 아니라 도서관, 박물관, 미술관 등 다양한 기관이 참가하고, 작년부터는 CoSA(Council of State Archivists)와도 공동 주최를 하고 있지만 규모는 CEAL 컨퍼런스와 ALA 컨퍼런스의 중간쯤이다. 그러나 등록비는 International Nonmember의 경우 Early-Bird로 신청한다고 하더라도 $409(한화 약 495,000원)로 가장 비싸다. 이러한 가격 책정은 전시 부스가 비교적 적고, 그로부터 받는 렌탈비가 높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 제83회 SAA 연례회의는?


올해 SAA 연례회의는 텍사스 오스틴에서 7월 31일부터 8월 6일까지 진행되었다. 북미에서 이루어지는 컨퍼런스는 주최 도시를 선정하는 것도 상당한 이슈가 된다. 일단 참가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여야 하고, 미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것을 고려해 교통도 편리해야 한다. SAA 컨퍼런스도 올해 오스틴에 이어 시카고, 애너하임, 보스턴, 워싱턴 D.C. 등 2023년까지 주최 도시를 미리 유치해두었다.


한편, 올해 연례회의 키워드 “Transformative!”는 과거 작은 소도시에서 문화도시, 하이테크로 거듭난 오스틴과 어딘가 닮은 면이 있는 것 같았다. 흔히 미국의 문화기관은 부족한 점 없이 운영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산과 공간, 인력 문제는 어디에나 있다. 가까이만 봐도 지난 5월 뉴욕 시장이 공립도서관 예산을 무려 1040만 불을 삭감하여 큰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아카이브도 당연히 예외가 아니다. 매일 듣는 팟캐스트에는 정치적 이슈와 함께 문서와 관련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카이브는 그 존재와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데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처럼 더 적은 자원으로 더 많은 것을 이끌어내야 하는 상황을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기회로 삼고자 “Lives Collide. Ideas Are Born. We Are All Transformed. (삶은 충돌한다. 아이디어는 탄생한다. 우리는 모두 변화한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기록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연례회의 프로그램은 기본적으로 회의, 포럼, 세미나부터 시작하여 오픈 하우스, 대학원생 포스터 세션, 전문가 포스터 세션, 전시, 북스토어, 커리어 센터 등 다양한 선택권이 있다. 이 밖에도 개인 봉사자가 운영하는 런치 버디 프로그램, 공연 감상 등 친목을 목적으로 한 행사들도 여럿 있었다. 모든 내용을 다루는데 한계가 있어 세션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주제 몇 가지를 골라 공유하고자 한다.



(2) Revolutionizing Use Policies: Easing Restriction for Greater Impact


기록전문가는 저작권이 소멸되지 않은 기록에 대하여 사용 승인 요청, 수수료 부과와 같은 형태로 기록물이 법적으로 정당하게 이용되고 있는지 감독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몇몇 문화기관에서는 저작권의 현상태를 파악하지 않고 저작권법이 허용하는 범위 이상의 제약을 부과하기도 하는데, 이는 연구자들의 정보접근을 방해하는 등 이용에 불편을 주고 있다. 이에 다양한 기관에서 온 기록전문가 5명이 각 기관의 이용자 방침을 혁신적으로 변화시킨 사례를 발표하고, 해결 방법을 제시해주었다.


그중 발표자들의 소속 기관은 아니지만, 서로 다른 발표자에게서 2번이나 언급된 사례로 UC Berkeley 도서관이 있었다. UC Berkeley 도서관은 이미 저작권 보호기간이 만료되었거나, 애초에 공유(Public Domain) 목적으로 생산된 자료에 대하여 이용 허가를 받아야 하는 절차는 이용자와 직원 모두에게 불필요하다는 문제점을 인식했다. 이후 UC 재단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고, 이용자의 자료 사용 범위가 공정 사용(Fair use)를 초과하는 때에만 이용 허가를 요청하는 것으로 절차를 개정하였다. 이 새로운 방침은 곧 이용자들이 자료 사용 권한을 요청하는데 부과해야 했던 수수료를 감소시키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자료 복사나 고해상도 디지털 복사와 같은 서비스를 제외하면 그동안 이용자들이 불필요하게 지불하였던 수수료를 폐지함으로써 자료 이용 부담을 줄이고, 활발한 연구 환경을 조성하는데 일조한 것이다.


이어서 Oregon Historical Society, University of Nevada, Las Vegas의 Special Collection & Archives Public Services, Duke University Libraries, 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Libraries에서 온 발표자들도 저작권, 이용 허가 요청, 수수료 부과에 대한 각 기관의 개정 지침을 설명해주었다. MIT Libraries에서는 자료의 유형을 크게 1) MIT가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는 경우, 2) 제3자가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는 경우, 3) 공유 컨텐츠의 3가지로 분류하여 서비스 절차를 도식화하였다. 이때 1), 3)과 같은 경우는 UC Berkeley처럼 별다른 요청 과정 없이 바로 자료를 이용할 수 있다. 반면 2)와 같은 경우에는 이용자가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는 제3자에게 직접 문의한 뒤, 사용 동의서를 받아야 한다. 이어서 Duke University Libraries에서는 이용자들로부터 자주 받는 질문과 직원들이 작성한 답변을 공유하여 참석자들이 실제 업무에 사용할 수 있게끔 도움을 주었다.


“Just use it: Change in UC Berkeley Library permissions policy lowers barriers for researchers” https://news.lib.berkeley.edu/permissions-policy 

UC Berkeley - Permissions Policies http://www.lib.berkeley.edu/about/permissions-policies 

MIT Libraries - Copyright and Publishing Policies https://libraries.mit.edu/scholarly/publishing/using-copyrighted-content/



(3) Description Section


기술 세션에서는 “Archives for Black Lives in Philadelphia’s Anti-Racist Description Resources,” “Implementing Named Entity Recognition in Description of Born-Digital Materials” 두 주제의 발표가 있었다. 전자는 ‘Black Lives Matter’ 운동이 불러일으킨 이슈에 대응하여 아키비스트와 사서 등 전문가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단체, A4BLiP(Archives For Black Lives in Philadelphia)의 활동을 소개하는 발표였다. 이 단체는 흑인 관련 역사기록물 수집, 보존의 중요성을 설파한 성명서를 발간하고, 흑인 커뮤니티에 기록 관리에 대한 조언을 제공하는 것과 함께 인종차별적인 기술(description)을 수정하는 표준을 고안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 기술 세션인만큼 이번 발표에서는 이 단체가 아카이브 검색 도구에 남아 있는 인종차별적 용어들을 발견하고, 수정했던 작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대표적인 예시로 ‘Slavery’라는 용어를 ‘Enslaved People’이라고 수정함으로써 부당한 사회제도에 의해 ‘노예화’된 사람이라는 의미를 드러내는 등 그 자체도 사회적 산물일 수밖에 없는 아카이브즈가 가해자의 용어를 사용하는 오류를 바로잡고 있다. 또한 이렇게 수정한 내역도 모두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이용자가 참고할 수 있도록 서비스하는 중이다.


다음으로 NC State University Libraries의 Special Collections and Research Center에서는 Born-digital 기록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기술하기 위한 방법으로 NER(Named Entity Recognition) 개념을 설명해주었다. NER이란 말 그대로 Named Entity(이름을 가진 개체)를 Recognition(인식)하는 것을 뜻한다. 즉, 문서 안에서 미리 정의해 둔 사람, 회사 등 단어들을 추출하여 분류하고 이에 부합한 정보들을 기술해주는 방식이다. NER은 단어(사전) 정의, 텍스트 추출, 프로세스, 데이터 클리닝, 순위 산출(Ranked output) 작업을 거친다. 비록 단어들을 직접 정의해야 하고, 사전에 정의되지 않은 엔티티를 놓치기 쉽다는 단점이 있지만 이 방법은 무수히 많은 Born-digital 기록이 이용자들에게 일단 ‘발견’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기증받은 Born-digital 기록 중 파일, 폴더, 숨겨진 파일, 휴지통에 버려진 파일 등 계층이 불분명하고 추적이 어려운 경우, NER 기술을 이용하면 이를 빠른 시간 내 효율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용자 입장에서도 아이템 계층까지 자료에 접근할 수 있고,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여러모로 유용하다.


A4BLiP(Archives For Black Lives in Philadelphia) https://archivesforblacklives.wordpress.com/ 

NER code for processing born-digital archival collections https://github.com/emilyhiggs/bdarchives-nlp 



(4) Next Stop, Archives! Tour Guide Transformation Tips 


마지막으로 소개할 내용은 아키비스트가 이용자들에게 컬렉션을 가이드 할 때 참고할 만한 팁을 공유했던 세션이다. 그동안 시민들에게 친숙하지 않았던 아카이브가 관심을 받기 시작하면서 아키비스트 또한 ‘Archival comfort zone’을 벗어나 그들의 컬렉션을 스스로 설명할 줄 아는 능력이 요구되고 있다. (미국 내 발표되는 논문이나 잡지를 살펴보면 교육학의 개념과 사례들을 도입, 실험하면서 아카이브 정보서비스의 새로운 가치와 방향을 제시하는 추세가 엿보인다.) 이번 세션에서는 Microsoft 사, Vanguard, Procter and Gamble Corporate Archives 등 여러 기관의 아키비스트들이 발표자로 나서서 각자의 팁을 말해주었다.


“저마다 다른 방문자의 관심사를 고려하라”, “기관 내 기록과 데이터를 분석하여 하나의 완성된 스토리를 전달하라”, “글보다는 시각적인 자료를 많이 활용하라”는 조금은 진부하고도 기초적인 팁 외에 눈길을 끈 건 스토리텔링 구성 방법을 소개한 발표였다. 이 발표자는 가이드를 준비하는 데 앞서 아키비스트가 스스로 “Why should they care about the archives?”라는 질문에 답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렇게 아카이브의 중심 주제를 이끌어낸 후, 이 주제의 타당성을 입증할 수 있는 기록물을 준비하는 것이 그 다음 단계이다. 이때, 타당성을 입증하는 과정은 다시금 ‘유형의(Tangible) → 무형의(Intangible) → 보편적 가치들(Universal Values)’의 검토 과정을 거친다. 만약 ‘노동’을 주제로 할 경우 유형(Tangible)에 속하는 부분은 노동자, 임금과 관련된 기록이 이를 대신할 수 있다. 무형(Intangible)에는 위험, 기술 등 기록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기록의 맥락을 통해 힌트를 줄 수 있는 것들이 속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생존을 위한 투쟁, 정의 등 보편적 가치들(Universal Values)을 이끌어낸다. 이 스토리텔링 방식은 곧 아키비스트가 아카이브의 핵심 가치를 이해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들에 대해서도 충분한 지식이 있어야만 구현 가능하다. 즉, 아키비스트에게 기존의 역할 외에도 소장 기록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과 책임이 새롭게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5) 기타


이 밖에도 웹 아카이빙(Web Archiving)에 관한 세션에서는 참가자들이 발표자의 질문에 실시간으로 응답할 수 있는 폴 에브리웨어(Poll Everywhere) 툴을 사용해 웹 아카이빙에 대한 기초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사이트들을 서로 공유하였다. 그중 도움이 될만한 링크를 골라 아래에 덧붙인다. (NYARC(New York Art Resources Consortium)는 The Brooklyn Museum, The Frick Collection, The Museum of Modern Art 세 기관의 컨소시엄으로 어떤 서비스를 이용하여 웹 아카이빙을 하는지, 이용자가 어떻게 웹 아카이브 컬렉션에 접근 가능한지 등 웹 아카이빙 방침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NYARC Web Archiving Q&A http://nyarc.org/content/faq-web-archiving 

NYARC Documentation https://sites.google.com/site/nyarc3/home

Archive-It https://archive-it.org/ 

Poll Everywhere Website https://www.polleverywhere.com/ 



(6) 마치며


아직 현장에서 제대로 일해본 적 없는 경험과 지식으로 고작 컨퍼런스 몇 번을 통해 대단한 깨달음을 얻기란 역부족일 것이다. 인턴 신분에서 50만 원에 가까운 참가비와 비행기값, 숙박비 등 경비가 부담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값진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더 컸다. 듣고 배운 모든 것들을 글로 쓰는 데 한계가 있지만 결론적으로 이번 컨퍼런스를 통해 미국 아카이브의 축소판을 경험할 수 있었고, 그들이 아카이브에 투영하고 싶은 가치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관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모든 발표들이 앞서 소개한 가이드 팁과 같이 ‘Tangible → Intangible → Universal Values’의 단계를 거쳐 진행되고, 결론을 이끌어내는 점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어떻게 아카이브즈의 투명성을 보장할 것인가? 소외된 공동체의 역사를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 우리가 하는 일들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정보의 민주화를 이뤄낼 것인가? 라는 물음은 발표 마지막에 꼭 등장하는 단골 질문이자, 성찰이었다. 지머슨이 말한 아키비스트 윤리가 그저 겉만 화려한 수식어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미국이 다인종, 다문화 국가이기에 그런 면도 있겠지만, 아마 그들이 아키비스트라는 점이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Transformative!”라는 슬로건을 걸고, 과거의 그들이 쌓아 왔던 아카이브의 낡은 질서를 비판하고 변화할 용기를 보여주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스틴시 아키비스트의 한마디를 소개하며 끝을 맺고 싶다. 컨퍼런스 때 보고 들은 모든 내용이 이 몇 마디에 모두 축약되어 있는 것 같다. “기록의 맥락을 발견하는 것만이 아키비스트의 역할이 아닙니다. 그러면 역사가와 아키비스트의 구분이 필요 없겠죠. 아키비스트는 그뿐만 아니라 왜 이 기록이 여기에 존재하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해요. 더 나아가면, 왜 어떠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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