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의 세월을 함께 걸으며 다퉈본 적은 딱 한 번이다. 대체로 영수는 늘 도연의 말과 행동에 귀와 몸을 기울여 집중하는 자세를 한다. 그 덕분에 도연의 너울거리는 마음줄도 아주 천천히 수직방향으로 조금씩 중심을 세워가고 있다. 모든 것을 늘 도연의 뜻대로 다 해줄 수 없지만 그의 몸이 앞으로 기울 만큼의 관심과 따스한 눈길만으로도 대부분의 트러블은 잠재울 수 있는 지혜를 가졌다. 그게 영수다. 그런 영수의 정성과 더불어 도연이 매일 아침 듣는 스님의 법문은 꼭 나팔꽃 넝쿨의 지지대 같다. 그 주변에서 배배 몸을 꼬아 떨어지지 않도록 붙어만 있어도 정도를 걸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 저 멀리는 해를 바라보며 밤이 되면 달을 볼 수 있는.
하루에도 수십 개씩 쏟아져 나오는 유튜브 영상들 중에서도 스님의 육성이 녹음된 아주 오래된 법문을 즐겨 듣는다. 산새 소리, 물 흐르는 소리마저 함께 섞여 노이즈 제거라고는 하지 않은 그때 그 시절 큰 스님들의 법문만의 매력이 있다. 성철스님, 송담스님, 청화스님 가리지 않고 듣는다. 모든 것은 하나로 귀결된다. 마음을 잘 써야 한다는 것. 모든 것은 공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단 하나, 화를 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화를 냈다 할지라도 그것을 관하고 알아차릴 수 있는 것. "내가 지금 화를 내고 있구나."라고 즉시 자각하는 순간 그것은 나의 일이 아니라 관조하는 일이 된다.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데 너무도 과학적이라 더 붙여볼 말도 없는 한 줄 법문 그 자체다. 단지 듣는 순간 도인이 되지만 영상을 끄고 현실에 한걸음, 한 숨 더 다가섰을 때 다시 나로 돌아오는 문이 너무도 명확하다는 것이 미결만이 숙제로 남는다.
도연은 생각했다. 머리부터 마음을 거쳐 단전까지는 삼위일체, 아니 수억 개 세포로 이루어져 있는 몸이라면 수억 위 일체이면 좋겠는데 아쉽게도 나노단위로 따로 놀고 있는 몸뚱이라서 슬프다고. 마음이 정화되고 안정되었다고 느끼고 있는 순간에도 눈에 보이는 뒤틀림, 지저분함, 멀뚱 거림 같은 그녀의 성격을 이루는 반대의 것들이 튀어나올 때마다 가시 달린 무언가로 명치를 찌르듯 말을 쏘아대고 급기야 쏟아내고 만다. 찰나에 일어난 일에 어안이 벙벙하다. 2초도 되지 않는 찰나의 시간도안 몇 명의 사람이 그녀의 머리와 마음속에 왔다간 건 아닌지 하는 의심마저 든다.
' 왜 단번에 알아채지 못하는 걸까. 왜 나이 마흔이 되도록 마음의 걸리는 응어리들이 그리도 많은 것인가.'생각해 본다. 생각한다고 해서 답을 바로 찾아낼리는 만무하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신경을 쏟는대에 족히 십 년은 보내고 있지만 이렇다 할 깨달음은 없었기 때문일까. 물론 인생은 끝까지 정답은 없기에 그런 생각들도 틀린 게 아니란 것만은 안다.
머리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입에서 튀어나온 물성 없는 공기 속의 소리의 파동은 그러니까 그 말뱉음은 보이지 않는 시간 동안 살아 숨 쉬는 공기를 까맣게 만들기도 한다. 그 분노라는 이름의 보이지 않는 그것은 '어두운 분위기'라는 막이 씌인채 서서히 회색잿빛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과 판단과 말이 따로 노는 사람을 나는 제일 격멸하지 않았던가, 그런 사람들은 사회에서도 소리 없이 걸러지지 않던가 하는 자문을 계속해서 해보지만 마음의 소리는 묵묵부답. 그렇게 또 오늘만 살아내는 약간의 무계획적 습관을 답습하며 이내 고민의 끈을 잠시 놓아본다. 좀 쉬었다가 가자는 마음이면 있어 보이는 표현일런지.
화를 내는 순간을 관조하지 못했지만, 화를 내는 즉시 화내고 있음을 알아차렸고, 그 알아차림의 시간간격을 나노단위만큼씩이라도 줄여가는 것. 그것을 희망으로 삼아 포기하지 않고 마음을 잘 가꾸어 나가려는 노력을 계속하는 것. 이것이 자정의 힘이라고 도연은 믿는다. 누구에게나 스스로 맑고 깨끗하게 만드는 무언가를 갖고 있음을, 그러한 능력이 마음 어딘가에 반드시 내재되어 있음을 그녀는 안다.
훗날 도연이 누군가에게 분노를 느낄 지라도 상대에게 '스스로 마음을 비워낼 시간을 잠시만 달라'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마음을 맑게 비우고 당신을 존중하겠다는 의미를 담은 자정의 말이 될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