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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살아가는 힘

by 여래

황야의 모래알만큼이나 작은 기억들이 모여 인생이 된다. 도연은 그리 믿고 있다.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작은 기억들, 주변인에게 두 번 이상 같은 이야기를 할 때처럼 재미도 감동도 없어지는 그저 그런 지난 이야기로 치부되는 일상의 비중 없는 기억들. 도연은 도리어 그 기억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깊이를 찾는다. 파고듦을 참 잘한다고 할 수 있다. 내게 보내주는 눈빛 하나로 더 큰 세상을 나가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 눈빛이 그녀의 세상의 주인이 되기도 한다.


영수에게도 이런식의 말들을 한다. 첫 구절을 떼는 순간 영수는 도연이 무슨 말을 어떤 방식으로 얼마만큼의 시간을 들여 설명할지 꿰고 있다. 십 년간 같이 살면서 적어도 스무 번 이상은 들어 본 스토리다. 그래도 묵묵히 듣는다. 뒷 구절을 맞장구치거나 이미 들은 이야기라며 그녀의 맥을 끊지 않는다. 계속 해서 묵묵히 듣는다.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도연은 이제야 안다. 단지 입을 닫고 다른 생각을 하며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고단함과 지루함을 간신히 넘겨 버틴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음을.


앞으로 살아갈 수십 년의 세월도 그리해야 한다 생각하면 몇 곱절의 피곤함이 밀려온다. 희망도 짓누를지 모른다. 성향이 전혀 다른 사람이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 부부라지만 어쩐지 영수는 나만 노력하는 것은 아닌지 가끔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리 생각한다고 해서 달라진 건 없다는 것 조차 알고 있다. 애초에 내 쪽에서 변화하려 하는 게 여러모로 현명하다고 판단하며 인생의 노를 천천히 저어 간다. 인생살이는 썩 그의 성품에 맞는 일이다. 노를 저어가는 일이 퍽 잘 맞기 때문이다. 천천히 멀리 바라보며 방향을 잡아가는 일이라면 인생은 분명히 그에게 살만한 것이다.


Potho by chatGPT



인생사 너무 당연했던 일,생각들도 도연을 만나면 좀처럼 진척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걸 왜 해야하는것인지,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에 대 한 실용적 고민보다는 실패하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주를 이룬다. 그도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까지 온 힘을 다해 실패에 대한 걱정, 아니 겁에 사로잡히는 사람은 여전히 적응이 어렵다. 함께 한지 십 년이 지나도 좀처럼 익숙해질 수 없다. 이런 상황은 상대를 좀먹는 짓이라고 할 수 있다. 알면서도 끊어지지 않는 도연의 시름도 깊어진다. 중간에 스러진 풀들의 대를 바로 세워주지 않으면 그렇게 자학하다 몸의 진물을 내며 곧 시들고 말 것을 안다. 그래도 그녀가 여태껏 살아 있다는 것은 하루에도 수백 번이고 나무막대를 세워 기둥에 묶어보기도 하고 스스로 스러지게 내버려두어보기도 하고 해충을 없애는 약을 뿌려보기도 했던 영수의 노력이 헛되지 않다는 것도 잘 안다.


마흔에 다다르니, 어떤지 도연은 누군가에게 위탁된 삶을 사는 것 같다. 딱히 의지조차 없는 그녀에게 그는 어떻게든 살아내라고 한다. 결국 그는 그녀를 살리고 있다. 그는 그녀에게 들어주고 세워주는 버팀목이다. 이제 그녀가 할 일은 단하나다. 십 년간 자신으로부터 옮겨 붙은 해로운 벌레들을 그에게서 다시금 떼어내 주는일. 내 몸에 있던 것이기에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삶을 갉아먹는지 어떻게 사람의 인상을 변화시키는지 잘 알고 있다. 애초에 도연은 누군가에게서 가장 귀한 것을 앗아올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쩐지 자신으로 인해 영수의 삶이 회색빛으로 바래버린 것 같다.


영수는 그녀에게 마음속으로 나지막이 전한다.

"언제든 네가 힘을 낸다면 나는 다시 회색빛이 아닌 투명한 빛이 될 수 있어. 이제 너랑 내가 함께 노력하면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반짝이게 될지도 몰라."

잠에서 깨어나 무엇때문인지 마음이 혼란스럽고 산란하기만 했던 아침, 도연은 남편의 마음속 메세지를 받아들인다. 다시 또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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