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어올 때면 도연의 시선은 칠판에서 창밖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한참을 머물렀다. 십수 년 전 아련함으로 덮인 학창 시절이란 제목의 작품.
지금도 바람이 불면 미래를 그리기보다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 기억 속 친구들은 아주 흐릿하다. 다시 한번 불러볼 수 있는 이름이 거의 없다. 가꾸어나가고 만들어나가며 영글어진 친구라는 울타리가 없었다. 그래서 기억 속에서도 쉬이 잊혀 버렸을지 모른다. 오히려 책상에 앉아 좋아하는 노래를 이어폰으로 들으며 수십 번이고 반복재생하는 모습, 수업시간보다 쉬는 시간에 공부하던 기억들이 선명히 남는다. 초등학교,중학교 할것없이 촘촘히 쌓여온 괴롭힘의 기억들 때문에 쉬는 시간에도 친구들과 어울린다는게 쉽지 않았다. 그 시절 공부를 강요하는 시대의 이로움이 도연에겐 유독 컸을 것이다. 다행이었다. 쉬는 시간이야말로 홀로 앉아 공부하기에 더없이 좋았기 때문이다. 반 아이들의 잡담, 소리들은 꼭 백색소음처럼 집중을 돋운다. 다만 쉬는 시간 10분간 공부를 하면서도 머릿속 지분의 절반은 다른 곳에 가있었다. 능률과는 반대의 이야기였다. 조금은 천천히 생각하고 싶었고 한 곳에 오래 있고 싶었으며 매 순간 평온해질 수 있길 바랐다. 야간자율학습시간에 공부하는 대신 죄책감은 줄이며 좋아하는 걸 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시간이 바로 독서였다. 고등학생 시절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은 틱낫한 스님의 '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였다. 책에 나오는 플럼빌리지를 본떠 도연의 메일 주소, 닉네임 모두 자두마을 또는 플럼빌리지로 저장해 두었다. 실제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도연에게는 이상세계 같은 곳일지도 몰랐다.
도연은 교사와 부모의 눈에 들만큼 무언가를 빠르게 해내고 완벽하게 해내며 야무지게 행동하는 전형적인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가끔 선생님들이 눈을 멀게 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도연은 교복을 갖춰입고 성실히 등교하며 수업시간에도 줄곧 칠판을 응시하는 학생이었다. 교복 입기를 좋아하며 교내 규칙을 지키는 것을 좋아했다. 왜인지 모르게 그러는 편이 마음이 좋았다. 규칙을 어기는 불안감보다 규칙을 지키는 불편함이 차라리 나은 편인것 처럼. 성실성만큼은 대단한 아이었다. 초,중,고 시절 내내 지각,조퇴,결석이란 도연에게 있을 수 없었다. 특히 한 두 번 수업시간에 눈이 마주치면 교과목 선생님들은 늘 도연에게 눈이 머물렀다. 중간고사 결과를 기대해봄직 하다는 기대와 함께. 다만 성적과 직결되지는 않았다는게 문제였지만. 중간고사 기간이 종료되고 꼬리표, 성적표가 나올 때 즈음 교과목 교사들은 도연에게 한 번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성실한 태도와 빛나던 눈에 반비례하는 점수 때문에.
그러나 저러나 그렇게 천천히 가는게 좋았다. 한걸음 내딛을 때 마음에는 평화를 외우고, 또 한걸음 내딛을때 얼굴에는 미소를 읊조리라던 틱낫한 스님처럼. 다시금 다가온 기말고사를 준비하고 곧이어 시작될 9월 모의고사를 준비하는 학생의 본분에 충실하기보다 태도는 바르게 하되, 이따금 머릿속 한켠은 마음에 대해 삶에대해 응시하고 바라보며 이생각저생각 떠올려보는 그 일이 더 의미있는 일이라고 도연은 생각했다. 그때 당시의 아픔과 고민, 불편함을 피하려는 회피일지 모르지만, 분명한건 그때의 도연의 마음에 들어온 그 무언가가 마흔이 다된 나이에도 마음을 뜨겁게 만들고 있다는 것은 적어도 진심이라는 걸 증명하는 것일테니까.
때로는 소처럼 우직하게, 천천히 한걸음씩 걸어 나가면 내가 못할일은 없을것이라고 도연은 한번더 생각했다. 그것이 누군가의 눈에는 한낱 한량처럼 보일지라도 , 팔자좋은 소리만 떠들어대는 무능한 사람처럼 보일지라도 말이다.
'나는 누군가를 속이는 여우보다 우직한 소가 될 것이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