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아홉

by 여래

'아, 눈감았다가 뜨면 딱 십 년만 빨리 흘러가 있어라.. 빨리 세월이 흘렀으면..'


오후 한 시 사십 분을 지나고 있다. 사십 명이 넘게 앉아 여유공간 이라고는 없는 비좁은 교실에 졸음 바이러스가 돌고 있다. 사교시가 끝나고 전력 질주해 달려간 급식실에서의 전투 결과는 식곤증 뿐이다. 대놓고 잘 수는 없다. 빼곡한 글씨들로 가득한 칠판을 완성시키기 위해 뒤돌아 분주히 분필을 휘갈기고 있는 교사옆을 응시하며 골똘히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아직 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한받는 것들로부터 자유롭고 싶던 도연은 그런 식의 공상을 자주 했다. 십 년 후, 그러니까 이십 대 중반쯤 되면 직업을 가질 것이고 고정적 수입이 있을 거라는 기대. 누군가를 지키고 보호할 수 있는 나이라는 안도감. 하나에서 열까지 허락받고 잔소리를 듣기보다 의지만 있다면 해도 된다고 법이 나를 증명하고 보장해 주니 두려울 게 없다. 만 18세의 힘이 이렇게 강력하다니. 무언가 자신의 생각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건 이리도 매력적인 것이다.


그렇게 만 십팔 세를 맞고 술로 가득한 대학시절을 지나 직장인이 되어 회식 2차 국룰인 노래방을 간다. 도연은 한 때 술과 노래방을 참 좋아했다. 도연과 어울렸던 몇 안 되는 선배, 친구들도 주당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유유상종이랄까. 아이를 낳으며 알코올 해독능력까지 같이 낳아버린 지금과는 다르게 신생아 간을 갖고 있던 시기였다. 아무튼 좁고 쾌쾌한 방 안에서 빨간색 땡땡이 모자를 뒤집어쓴 유선 마이크에 입을 가까이 대고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술냄새와 함께 내뱉듯 노래한다. 어느새 서른 중반이 되고 회사 연차와 직급과 연봉은 아주 더디지만 쌓여 가긴 한다. 한 7년쯤 지나니 제법 직장인 다운 급여(세후)가 통장에 꽂히는가 싶다.


나는 아닌 것 같지만 누구보다 타성에 젖은 매너리즘과 나 없으면 회사의 한 축이 무너질 것이란 착각에 헤엄치는 시기가 보통 이 시기에 시작된다. 도연도 그걸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늘 그게 문제다. '나도 그럴 수는 있긴 한데,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위로는 적당한 겸손이 아래로는 살짝 가오가 있어야 하니 업무 외 심적 부담이 참으로 크다. 일은 또 열심히 하니까 뭐라 할 수도 없다. 다만 마음 씀씀이 자체를 보자니 '시건방의 시기'라 일컫고 싶다.


"근데 말이야. 우리 회사.."라는 운만 띄워주면 뒷얘기는 숨도 안 쉬고 두 시간쯤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시기. 그 시기에 해당되는 사람은 보통 창업자에 빙의된다. 마음만은 고 이병철, 고 이건희 씨와 다르지 않다고 여기는 듯하다.


"아 ~ 그 부장은 그 사건 그렇게 마무리하면 안 되는 거지. 밑에 애들이 힘들어하잖아.. 하.."


뭐 밑에 애들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인가 싶지만 그보다는 선견지명 내지 혜안을 나는 갖고 있다는 것처럼 위세 떠는 일일지 모르겠다. 그렇게 입사 7~10년 차만 겸손하게 잘 넘어가면 괜찮으련만 보통 그쯤되면 회사와 사회에 대한 불만에 이를 바득바득 갈게 된다. 그렇게 또 수년이 흘러 드라마 '서른아홉' 주인공 차미조는 현실에서 잘 풀린 케이스라며 집구석 비평가 노릇을 한다. 그나마 도연은 속으로만 생각해서 참 다행이다.


출처: Gemini





도연에게 요즘은 속절없이 나이만 먹어가고 있다는 말이 이보다 딱일 순 없다. 대체 요즘 무얼 하고 사는지 대충 봐서는 짐작하기 어렵다.

"요즘 뭐 하고 지내?"라는 질문에 답이 매일 바뀐다. 정말 그날 '뭐' 했는지 즉답하기 때문이다.


* 꿀팁: 즉답 후 한 마디 정도 덧 붙이면 그 세계 물 좀 먹고 나름 고정적으로 그것을 유지하는 사람 같아 보인다.


"응, 글썼지. (+ 오늘은 좀 빨리 써지더라")

"아, 애들 수업 갔다 왔어! (+ 그 아이는 6살인데 나보다 집중력이 더 좋더라.")

"운동했어!( +사실 잠에서 깨어나 이불 위에서 손깍지 끼고 좌우 흔들며 스트레칭 5분한게 다다. 하지만 그것도 내겐 운동이니까")


도연의 일상에 깊은 관심이 없는 사람이 이런 플로우의 대답만을 들으면 도연이란 사람은 굉장히 다재다능해 보인다. 실상은 이도저도 아니다.


불혹을 앞둔 서른아홉. 세상 일에 정신 뺏겨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다 해서 불혹이라는데 도연은 온갖 유혹을 자비없이 흡수해 버린다. 호기심도 아니고 모험심은 더더욱 아닌 그저 귀가 얇고 아승지에 비할 겁의 소유자. 일단 빨아드린 뒤에 분별하고 뱉어내느라 진력을 낭비하는 편. 인생이 왜 그리 괴로웠는지 도연은 '아차'싶어 급 이마를 탁 치게 된다.






도연은 실제로 하루 중 대부분 시간 글을 쓰지만 수입 발생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한 두 명, 많게는 열댓 명의 독자가 글쓰기 커뮤니티에서 눌러주는' 좋아요'에 자신의 글의 가치, 대중성을 가늠해 본다. 대중 이라기엔 너무 작고 소중하다. 진정으로 살기 위해 깨어있는 삶을 위해 글을 쓴다고 했다. 헌데 도연이 쓴 글은 그렇지 못하다. 대부분 과거에 아주 단단히 얽매여 똘똘 뭉쳐있다.


정말 위험한 건 자기가 좀 쓰는 줄 안다. 일필휘지라 표현하기도 한다. 생각나는 대로 쉬지 않고 키보딩 후 오탈자와 띄어쓰기 검열을 한다. 그 외 별다른 수정 작업 없이 '완료'버튼을 클릭한다. 어쩌면 글 한편 더 늘이는 것에 강박이 있는 사람일지 모른다고 스스로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런 행위를 여전히 '일필휘지 또는 꾸밈없이 써내려 가는 나만의 필법'이라 여기며 몇 없는 자신만의 간지라고 생각하고 이상한 고집은 잘 꺾이지 않는다. 그런 식의 글쓰기 방법을 계속 고수하고 있다. 그런 도연의 글쓰기 수명이 어디까지 갈지는 좀 지켜봐야 할 일이다.


아무튼 말이다. '글을 쓰는' 사람을 더 생각해 보자. 한강 작가님 같은 어나더 레벨에 계신 분은 입에 올릴 수도 없다. 만일에 의사 남궁인 씨나 배우 박정민 씨처럼 본업에서 특출난 성과를 겸비한 사람이 일과 중 틈틈이 글을 쓴 것이 대중성까지 갖게 되었다. (실제로 두 분은 작가이기도 함.) 그들에게는 엄청난 스케줄 홍수에도 글 쓰는 재능까지 겸비한 만능+팔방미인이라 불리거나 지성미와 주체성, 근면성까지 칭송받을 수 있을 테다. 당연히 그들은 대단히 멋지고 매력 있고 훌륭한 사람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도연은 이들과 다르다. 하루 일과 중 가장 크고 뚜렷이 드러나는 일이 글 쓰는 일이다. 오직 그뿐이다.




아, 한 가지 더 있다. 도연은 요즘 기도에 열중한다. 그간 무언가 간절하게 원하는 일은 없었다. 아니, 있었어도 기도는 꾸준함이 생명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급한 일이 있을 때만 하는 기도를 굉장히 간사하다고 생각하던 도연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힘들고 죽을 것 같아도 기도하지 않은 날이 더 많았을지 모른다. 무튼 도연은 기도를 꾸준히 계속해서 오랜 시간 해온 적이 없다. 불자로서 절에 다니고 법회에도 수년을 참석했었지만 의식으로서의 기도일 뿐, 스스로 시간을 내어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기도를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도연은 요즘 연일 꿈을 꾼다. 악몽을 꾸거나 영락없는 흉성을 가진 해몽을 가진 꿈들과 함께 가위가 눌리기도 한다. 새벽 내내 그런 류의 보이지 않는 어떤 힘들이 도연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다. 그런 꿈이 도연의 불안함이 반영된 것 뿐인지 예지몽인지는 여전히 모른다.


그래서 도연은 다시 스스로 기도를 시작했다. 다급하고 두려운 진중에 있음을 느낀다.


나를 믿고 부처님 법을 믿는 '자등명 법등명'이 불교의 핵심기조인 것을 도연은 잘 안다. 하지만 최근 삼 년간 도연의 행보는 무속과 불교 사이를 교묘하게 넘나 든다. 불교는 답을 스스로 찾지만 무속신앙은 답을 신령님께서 알려주신다. 즉문즉설이 가능한 것이다. 사실 즉문즉설하면 법륜스님도 계시지만 나 같은 일반인에게 즉문즉설은 무속이 더 가깝다고 도연은 생각한다.


점점 도연이 무속에 빠져드는 동안 그저 불교가 민속, 무속신앙의 일부를 문화적으로 받아들인 부분이 있다(사찰에 가면 산신각, 삼성각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불교와 무신앙을 동일시하는 등의 정신승리를 통해 한참을 헤매다 이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여전히 도연에게 무속은 약간 무섭다. 주로 안 좋은 일을 겪게 된 이유에는 신께서 노하셨거나 조상천도를 제대로 하지 못했거나 잡귀와 같은 단어가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삼재 중에서도 악삼재와 아홉수가 들었고 가정 단속 잘해야 한다는 무서운 이야기들과 함께 조상이 잘 감기고 칠성줄이 센 편이며 현재 신이 내려와 천문까지 열려 있는 상태라는 말들은 도연의 멘털이 바사삭 무너지기에 차고 넘쳤다. 막아보려 했던 일들은 점점 더 커졌고 불안은 더욱 커졌다 내 종교가 두 개가 된 것은 아닌지 도연은 혼란스러웠다. 신이 없다고 보진 않지만 '나는 불자'라고 계속 되뇌었던 도연은 불교는 무신론인 것을 알고 있고 30년 내내 불자로 살았다. 이런 상황에 마음 한켠이 불편했고 불안했다.


처음엔 마음이 편해지고 고민으로부터 해방되고 급한 불을 끄고 싶었을 뿐이다. 나름 자신과 가족에게 큰일이다 싶은 일들을 최대한 덜 고통스럽고 덜 힘들게 이겨내 보고 심리였을 테다. 허나 그러면 그럴수록 '맹신'이란 것을 하게 되고 큰 돈을 쓰게 되었다. 도연은 삼 년간 약 오백만 원 정도의 점사비, 치성비를 썼다. 그렇게 까지는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정신 차리고 스스로 기도하며 다시 정법을 믿는 불자로 돌아오겠다고 다짐하며 은행거래내역을 확인해 보고는 적지 않게 놀랐다. 신당엔 소금단지 하나만 모셔두고 담배를 뻑뻑 피워댄 노인네가 있기도 했고, 오만원으로 초공양을 올리니 초값도 안나오니 삼십만 원씩 내야 일이 잘된다고 한 무당도 있었다. 물론 정말로 도연을 앞날을 위해 초기도를 하고 여러 정성을 들여주신 분도 계시다. 그 업계에 계신 모두가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도연은 생각한다. 마음이 편안해지려고 시작한 일들에 또 다른 불편함이 생기면서 이런 상황을 지속할 수는 없다고.


그래서 도연은 다시 한번 스스로 하는 기도를 선택했다. 경전을 읽고 108배 절을 한다. 때때로 진언을 중얼거리기도 한다. 도연은 심중 불안과 불행이 사라지거나 잊힐 때쯤, 좀 더 무감해질 때 즈음 자연스레 하루이틀 기도를 미루며 간절함도 식어갈 수 있겠다는 의심을 스스로에게 해본다. 적어도 스스로에게 간사한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되뇌지만 진짜 그럴 수 있을지는 스스로 믿지 못하는 단계다.






여고시절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어른이 되기만을 기다리던 도연의 결말은 이런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도연의 서른아홉이 참 무겁다. 참 기구하다. 다 자업자득이라 여기니 탓도 할 수 없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온전히 스스로의 무지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단지 무속에 빠진 스스로를 후회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할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것도 모두 도연 스스로의 생각과 행동이 만들어냈다. 도연은 미칠 것만 같다. 돌고 돌아 다시 맞이한 두 번째 스무 살을 목전에 두고 하루에도 오만가지 생각들이 교차하며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겹겹이 쌓인 어마어마한 업장의 두께가 가늠도 되진 않는다. 핀셋으로 한 장 한 장 떼어내듯 파헤쳐야 그 실상이 보일것 같다. 잘못 되었고, 그르친 일의 모든 잘못이 자신임을 알았을때 조용히 책임지고 퇴장해주는 것도 복이 많은 사람이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도연은 그럴 수도 없다. 그때의 나보다 더 어린 자식들이 둘이나 있고 남편도 있다. 그저 사는게 사는게 아니었기에 죽은 심장이 아닌 채로 살겠다며 하루종일 글을 쓰고 마음을 바르게 돌려보기 위해 시작한 기도, 이 두 가지로 하루를 채워도 모자라다고 도연은 생각한다.


정말 글을쓰며 살아질 수 있기를 간절하게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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