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시시비비

by 여래


슬픔을 증명하는 것에 대해 도연은 제법 오랫동안 생각 해왔다.

"어떠한 이유로 이런 류의 일에 슬픔이란 감정이 먼저 드는 사람이 되었고 그러지 않기 위해 노력해 봤지만 고치기 쉽지 않았으며 그때의 기억이 내게 슬픔으로 남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중."의 형식을 빌어 논리 정연하게 말해야 하는 슬픔의 아이러니에 대해서.


"왜 별것도 아닌 일에 울고 그래?" 라거나 "넌 너무 감정적이야." 또는 "울지 마. 우는 사람이 제일 꼴 보기 싫어."라는 식의 말을 가까운 이에게 자주 듣는 사람이 그런 상황에 노출될 확률이 크다. 단지 몸과 마음이 이성보다 먼저 반응한 것을 이유로 슬픔 와중에 반드시 보여줘야 하는 게 정반대의 깔끔한 논리와 냉철한 이성이라니. 충분히 슬퍼할 권리도 다른 사람에 게 있다는 생각이 들어 도연은 못내 억울하다.


출처: Gemini


'슬픔에 취약한 걸 사람들은 나약하다 말해. 그러면 안 되는 건가?.' 도연은 또 의문을 갖는다.

여러 의미로 관계를, 삶이란 과제를 '잘'해내고 싶어서 였겠으나, 자의가 아닌 타의로 받아들여 그들에 맞춰 살아가는 인생이 시작된 건 그즈음이었다.





도연은 상당히 긴 세월 '단단한 사람'에 꽂혀 살았다. '미스터 선샤인' 주인공 고애신처럼 양반가 영애로 한 떨기 꽃 같은 삶보다 불꽃같은 삶을 선택한 사람, '드라마 남자친구' 주인공 차수현처럼 상처가 많지만 맑고 예쁜 얼굴로 조곤조곤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사람, '영화 인턴' 주인공 줄스오스틴 처럼 좋아하는 일에 꽂혀 크게 성과를 크게 일궈낸 사람. 사실 주인공 세명 다 예쁘다. 도연은 예쁜데 본업에 충실하고 강단 있는 사람에 꽂힌다. 드라마를 정주행 하는 가장 큰 기준이 그것이다. 도연은 늘 그렇게 살고 싶어서였을 테다. 그 와중에 또 우왁스러운(동의어: 걸걸하다 / 서울 토박이 도연엄마표 단어) 단단함은 싫다는 게 킥포인트다. (키포인트 아님 주의)


유전과 후천적 요인 사이 그 어디쯤 영향으로 도연은 중학생 시절부터 곧잘 드라마 주인공에 자신을 대입해 보는 일을 즐겼다. 드라마 여운에 자주 허덕이는 편이다. 몇 시간이 흘러도 여전하다. 밤이 되어 양치할 때 즈음 여전히 여운 가득한 얼굴을 들어 거울을 본다. 이따금 볼일을 보고 휴지를 풀 때도 혼자 그 감정을 곱씹는다.


그때의 도연이 놓친 것 하나가 있는데 반드시 주인공 주변엔 슈퍼 히어로 같은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그 슈퍼히어로는 절대 주인공이 보이는 곳에서 대놓고 돕지 않는다. '우연'과 '희생'이 필수이며 중간에 주인공과 오해와 갈등을 수반한다. 그럼에도 슈퍼히어로는 주인공을 돕는다. 그리고 서로의 진심을 알게 되는 스토리. 도연이 정말 꽂힌 건 아마 이 대목이다.


'오해가 반드시 풀린다는 것, 슬픔을 슬픔으로 온전히 알아주는 것.'


사실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도연은 생각한다.

현생에서의 '고'는 99% 인간관계. 인간관계의 틀어짐은 반드시 오해에서 비롯된다. 드라마에선 그런 오해가 생겨도 결국 해피엔딩임이 정해져 있으니, 마냥 좌절하고 절망하지 않아도 된다. 또 그 집단의 대부분이 나를 등져도 유일하게 바라봐 주는 한 사람이 있다. 도연이 그리던 그 주인공의 단단함은 사실 바로 옆 슈퍼히어로 덕분에 생긴 것인지, 원래 단단한 멘탈이었을지 모르지만 아무튼 도연은 그런 류의 주인공을 여전히 좋아한다. 그리 되고 싶다. 그런 삶이고 싶다고 여러 번 생각해 왔다.




산전, 수전, 공중전 중에서 수전쯤 겪어봤을 나이가 되었지만 도연의 삶은 그 강단 있는 사람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그래도 도연 옆에 슈퍼히어로가 한 명 있음에 천운이라고 생각해 본다. 적어도 슬픔의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아도 되는 삶. 슬픔을 느끼는 이유에 대해 분석하고 곡해하지 않는 사람을 만났으니 이만하면 살만하지 않냐고 되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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