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스치는 생각 끝에 얻게 된 깨달음과 앎들이 참 많다.
꽤 오래 전 겪었던 일들이 잊힐때 즈음 설거지, 양치 등 단순 노동을 하고 있을 때 꼭 두더지처럼 결과 값을 내어놓는 일이 많았다. 내 기준 설거지는 참 신기한, 대단한, 중독적인, 허나 강요하면 제일 하기 싫어지는 활동이다. 내면의 화남이 폭발하게 되는 배경엔 꼭 설거지가 있다. 설거지하다 떠오르는 수많은 상념들. 그 끝에 온전한 몰입을 낳아 새로운 앎을 만들어주는 것도 설거지다. 그런면에서 설거지 거리가 차라리 많은게 좋은날도 있다. 그릇, 접시들이 깨끗해자고 건조대에 차곡차곡 쌓이는 모습을 보고있노라면 가히 귀찮고 힘들어도 하루 한 번은 꼭 해줘야 하는 일임에 분명하다.
헌데 이렇게나 삶에서 치열한 혈투 후 '설거지'라는 위대한 결과 값 도출기계가 뱉어낸 '알맹이'들이 정작 필요한 순간에 다 어디로 흩어진 것인지 자문해본다. 삶에서 얻은 것들이 다시 또 삶으로 산화하는 인과법의 이치라도 구현하는 것인지.
지금의 나는 매순간 깨어있으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는 커녕 40년간 답습해온 감정의 골로가는 흐름 습관에 젖어 사는 건지, 응당 주부, 엄마,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삶이라면 이만해도 정신줄 잡고 잘 살아내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 구분이 어렵다.
늘 기준이 있어야만 조금이나마 안심을 해왔던 나를 가장 두렵고 미치게 만드는 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보다 '무에서 내 기준을 잡아 나아가야 하는' 이런 순간들이다. 매사 성실히, 나아가 잘하고 있는 '나'여야 한다는 마음, 내 노력이 빛을 발하지 못할 순 있으나 폄훼되서는 안된다는 두려움과 조바심에 허덕이며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나를 볼 때.
누군가 정답을 주며 '이제는 그걸 잡고 올라와'라고 외치고 있다. 하지만 내 눈엔 콩깍지가 씌여있다. 옆에서 애원을 해도 보이고 들리지 않는다. 폭풍같은 부정적 감정에 온전히 휩싸인다. 그렇게 나는 꼬박 어제 하루를 써버렸다. 아니 또 그 감정에 속아버렸다.
긴 시간을 쓴것도 억울할테지만 이 감정과 아무 상관이 없는 두 아이의 눈물, 콧물을 쏙 빼가면서 두 손으로 식탁을 꽝꽝 쳐가는 80년대 아버지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취해가면서. 비겁하게 남편이 없을 때 보이는 내 모습이 얼마나 꼴보기 싫은지 또 한번 보게된다.
아이들이 잠들기 전 침대 위가 그나마 우리 사이를 이어주는 만능의(만남의?) 장소다. 사실 만능의 장소도 이제는 조금씩 저물어 간다. 한 아이는 사춘기, 한 아이는 성격이 꼭 나를 닮은 아이였기에.
침대 위에 함께 누워 했던 약속 중 지킨 것이 거의 없는 엄마. 이제는 의례히 잠들기 전 거쳐야 할 '코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 되어버린 시간.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 정말이지 아직은 말이다.
오늘의 일을 아이들에게 있는 그대로 사과했다. 아이들이 더 어렸던 시절엔 완곡어법으로 표현했었다. 그래서인지 온전히 가 닿지 않는 말들이 있었을지 모른다. 이젠 돌리지 않는다. 그럴 시간도 없거니와 곧 11세,9세를 맞이하는 아이들 나름의 구력(?)을 믿어보는거다.
" 엄마가 밖에서 있었던 일의 감정을 그대로 집으로 끌고 들어왔네. 너희에게 화내서 미안해. 엄마는 40살인데도 안과 밖을 구분해서 대하는 게 쉽지가 않네. 너희가 미워서가 아니고 엄마가 일하는 곳에서 속상하고 화나는 일이 있었어. 그 화를 엄마가 삭이지 못해 집에 와서도 내내 표정이 안 좋았어. 그 마음의 안경을 낀 채로 너희를 대하다 보니 아까 같은 모습이 나왔어. 미안해. "
그제야 큰 울음을 터드리는 첫째 아이, 자신이 잘못한 게 없음에도 미안하다고 말하는 둘째 아이. 마음을 다잡을 시간이 수 시간이나 앞서 있었지만 결국 아이들과의 감정적 폭발이 일어난 후에야 마음을 가다듬는 시작을 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마저도 다행이라면 다행.
오늘 내게 밖에서 일어난 일은 내가 가야 할 길에 징검다리일 뿐이다. 징검다리 위에서 잠시 일어난 잡념일 뿐이다. 생각이 만들어 낸 것들이었으니 더욱 그러하다.
오히려 '징검다리'이기에 빠르게 집중하고 몰입해서 깔끔하게 건너야 했다. "이 다리는 무엇인고? 이 다리를 왜 내게" 라는 생각따위를 해봤자 버티며 힘주는 순간 물가에 빠지게 된다. 이 다리를 내게 준 이유는 간단하다. 물 위를 잘 건너가라는 그 의미다. 그걸 알면서도 자꾸 다른 상념을 붙잡는다.
설사, 실수로 물가에 빠졌더라도 징검다리가 있는 물가는 수위가 깊지않다. 그저 올라오면 될 것을 이것 저것 핑계를 대기 시작한다. 그저 다리를 건너는 시간 동안 집중해서 건넜으면 될 일을 여전히 물가에서 허덕이게끔 '내가'만들었으니 사실은 그 누구를 탓하겠는가?
내가 가야 할 곳은 저 앞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야하는데 말이다.
하루를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보내고 나니 이제 또 하나가 보인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니었음을 가능한 빨리 느끼게 될 때 조금은 변화해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지 않나 하고 말이다.
나는 다시 또 설거지를 하러 가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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