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떡볶이지

by 여름이

2024년 3월 봄날이 왔다.


떠나고 싶었다.

상황은 변하지 않았고, 답답한 마음에 ‘여기’가 아닌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다.

해외로 갈 여력은 없었고, 최대한 멀리...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제주도.

마침 학교 출석 수업 일정이 도왔다. 제주도는 주말 수업이었고, 그 주는 청주에 가는 날도 아니었다.

그래 가자! 그리고 내가 가장 먹고 싶은 것을 맘껏 먹으면서 마음을 달래자.


떡볶이!


평소에 쉽게 아낄 수 있는 것이 식비라 한 끼의 기본을 3천원으로 잡아놓고 머리를 굴린다. (대신 그렇게 아껴서 책과 술을 산다.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식사도 예산 제한에서 제외) 세일 행사 때 쟁여 두었던 라면 하나에 과자 한두 봉지, 파스타소스 1+1에 면을 사면 6끼를 먹을 수 있으니 한 끼로 나누면 OK, 오늘은 본가에 빌붙기, 본가 냉장고 파먹기 뭐 이런 식이다. 그래서 떡볶이도 사실 자주 먹지는 못하고 1+1이나 3봉지 9,900원 같은 행사를 할 때 나에게 선물하듯 레토르트 떡볶이를 쟁여 둔다. 애정하는 ‘가게 떡볶이’는 한 달에 두어 번 오늘은 스트레스가 좀 많으니 스스로를 달래주자면서 먹는 정도? 이번엔 정말 작정을 했다. 이틀간의 수업 시간을 고려하면 주어진 기회는 5번. 섬의 떡볶이는 과연 어떤 맛일까? 금요일 밤 지친 몸으로 퇴근을 하고 공항으로 직행, 비행기가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 번뇌는 떡볶이를 향한 갈망으로 갈아치웠다. 아래로 보이는 야경 속의 자동차들도 꼬리를 물고 어디론가 움직이고 있었다. 하늘에 가까워지며 풍경도 아득해지고, 자동차들도 후미등의 아스라한 불빛으로 변해갔다. 이건 밀떡, 저건 쌀떡, 고속도로일까? 여기는 누들떡, 톨게이트인가? 저기는 떡국떡이구나. 그렇게 짧은 비행 중에도 피곤에 눈이 감겼다.



1 토요일 아침 - 짱구분식


아침이 밝았다. 숙소 근처에서 가볍게 떡볶이로 배를 깨우기로 했다.

떡볶이 맛집으로 검색 했더니 가장 가까운 곳은 ‘짱구분식’. 오, 이름이 좋은데? 우리가 좋아하는 짱구의 이름이 들어간 곳이야.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커다란 매장은 한산했다. 여유롭게 아침 식사를 즐길 수 있겠군. 맛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대신 그릇이 남달랐다. 왠지 정겨운 양푼?그릇에 담겼다는 이유만으로도 소박한 양은 가볍게 용서가 되었다. 첫 시작이니만큼 떡볶이만으로는 아쉬우니 오뎅 한 그릇을 더하여 산뜻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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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토요일 점심 – 미래네


수업은 점심이 끝나고 시작이라 그 사이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곳 어디든 가보고 싶었다. 돌아올 시간을 고려하여 멀지 않은 곳의 한라수목원과 탐라도서관을 가볍게 둘러보고 왔다. 점심은 바로 등교해야 하니 학교 근처 떡볶이집을 찾았다. 마침, 가까운 초등학교 바로 옆에 떡볶이집이 있었다. 이름도 ‘미래네’ 나의 미래를 응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미리내라는 단어랑도 한 끗 차이. 떡볶이도 나를 사랑하는 게 틀림없어. 읽고 있던 책을 들고 갔는데 <자연에 이름 붙이기>,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모티프가 된 책이었는데 접시마저 물살이의 모양이라니. 이걸 운명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 달달한 맛과 모양의 학교 앞 떡볶이, 이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조합이야. 아이들이 좋아하는 회오리감자와 슬러시도 있었는데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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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토요일 저녁 – 제주바른손김밥


수업이 끝나고 이제 세 번째 떡볶이 저녁을 먹을 시간. 8시만 되어도 문을 닫는 곳이 많았다. 그나마 숙소에서도 가깝고 아직 문을 연 곳, 그리고 마트가 바로 옆이라 식사 후 소소한 장보기도 가능한 곳, ‘제주바른손김밥’이 있었다. 선생님이 되어야 하니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한 바른 마음가짐을 생각하며 여기에서 경건하게 떡볶이를 먹자. 가게 이름에 김밥이 들어가서인지 평범한 그릇에 담긴 떡볶이는 막내처럼 아담하고 귀여웠다. 그렇다고 김밥까지 먹기에는 부담스러우니 김말이로 대신했다. 식사가 끝나고는 바로 옆 마트에 갔다. 남은 소중한 시간에 술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무감에 한라산 소주를 샀다. 과제를 하며 음주를 실행하고, 새해 목표를 이어 나갔다. 떡볶이 세 끼와 수업, 가벼운 나들이에 음주까지 나름 알찬 하루를 보냈다고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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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일요일 점심 - 나눔김밥


보통 출석 수업 주간은 세 과목을 하는데 난 이미 4학년. 구멍 난 과목을 수강하다 보니 제주에서 들을 것은 한 과목(교과논리및논술) 뿐이었다. 이튿날도 수업은 오후부터 시작. 음주의 여파(사실 술은 많이 남기긴 했다)로 늦잠을 자서(예상한바), 아점으로 끼니를 때우고 가기로 했다. 이제 하루밖에 남지 않았는데... 어떤 떡볶이집이 좋을까... 지도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고민했다. 프렌차이즈는 안돼, 제주도에만 있는 가게이어야 해. 역시 떡볶이는 학교 앞이지. 산책 겸 조금 멀리 걸어볼까? 2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신광초등학교 교문 앞에 있는 ‘나눔김밥’. 스트레스를 이런저런 나눔으로 풀고 있던 나에게 딱 맞는 이름이었다. 안 갈 수 있어? 가벼운 발걸음으로 숙소를 나섰다.


‘학교 앞 분식집’이라는 이미지에 딱 어울리는 적당히 허름하고, 아담한 크기의 가게. 이번에는 떡볶이의 친구로 주먹밥을 함께 시켰다. 떡볶이와 비닐에 담긴 주먹밥을 앞에 두고, 어릴 적 떡볶이를 먹던 기억을 떠올리며 숟가락으로 떡을 건져 입에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등학교 어린이 둘이 들어와 내 앞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라면을 시켜 먹었다. 조잘조잘 수다와 호로록 라면을 삼키는 소리까지,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고 순간 울컥했다. 안돼 여기서 칠칠찮게 아저씨가 갑자기 눈물 질질 짜면 어떡해. 꿀꺽 눈물을 삼키고 다시 떡볶이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귀는 계속 아이들의 목소리를 주워 담고 있었다. 아이들은 금세 라면을 다 먹고 새들의 지저귀는 목소리로 주인아주머니께 ‘안녕히 계세요’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행복과 아쉬움 속에 식사를 마치고, 길을 건너 학교 담을 따라 지나가는 중에, 눈에 띄는 현수막이 있었다.

*‘튼낼 가치 이신 4·3, 우리 조끗디 가ᆞ치이신 4·3’


일단 4·3에 반가웠고, 한글은 분명한데 뜻을 제대로 알 수는 없었지만, 초등학교에서부터 4·3을 기억한다는 것이 너무 고마웠다. 학교에 돌아와 같은 조에 마침 제주도에 살고 계신 선생님이 있어 물었는데... 잘 모르셨다. 반 정도? 뭐 좋은 뜻이겠지. 여튼, 그렇게 가게 이름과 현수막의 문구, 아이들의 모습. 이것만으로도 ‘나눔분식’은 이번 제주도 여정 최고의 맛집으로 등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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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일요일 저녁 – 관덕정 분식 (2024.08.28. 영업종료)


바다가 보고 싶었다. 바닷바람을 맞고 싶었다.

제주도는 서울보다 버스가 일찍 끊겨서 서둘러야 했다. 바닷가 근처를 지도의 중심에 두고 떡볶이를 검색했다. ‘관덕정 분식’? 떡볶이집 이름치곤 특이하네. 찾아보니 꽤 유명한 곳 같았다. 가자! 넓고 쾌적한 실내와 다양한 스낵들도 파는 떡볶이 가게라기보다 떡볶이 레스토랑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곳 이었다. 하지만 이런 건 나에게는 감점 요소, 정작 이 가게의 정수는 바로 책과 떡볶이라는 단어의 재해석이었다. 화장실 문 앞의 선반에 전시해 둔 떡볶이책들. 깔끔하고 비교적 고급스런 느낌의 내부를 보며 떡볶이집으로서는 좀 실망을 하던 차에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 여러 책들 중에 내가 읽은 것은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한 권 뿐이라는게 부끄러웠다. 그리고 키오스크 배경화면에 적힌 한자 德福基(덕복기) - ‘덕과 복이 가득한 덕복기’. 그래 떡볶이는 덕과 복의 터 위에 세워진, 어린이를 품는 덕과 아이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만드는 먹거리. 내게 떡볶이는 그런 음식이다.

그래, 관덕정 분식. 넌 떡볶이집이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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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며


누군가는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을 것이다. 떡볶이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떡볶이집 기행인 것 같은데, 정작 맛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네? 그래 맞다. 오래되어서 기억이 잘 안 나는 것도 있지만, 난 떡볶이의 맛을 딱히 따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차은우처럼 생기지 않았다고, 박은빈처럼 생기지 않았다고, 예쁘지 않을까?

맛없는 떡볶이는 없다. 조금 부족한 떡볶이가 있을 뿐.



떡볶이가 아닌 이야기


<아무튼, 떡볶이>를 읽으며 그 전부터 벼르던 이 글을 썼습니다.

사실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은 떡볶이에 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당신에게 꼭 전해주고픈 책입니다. 그때 읽었다면 우리의 운명은 달랐을까요?

아, 그때는 이 책이 나오기 전이었군요.

‘아무튼, 당신’은 알겠지요. 미안합니다.




*AI에 물어본 뜻은 이랬다 “기억하고 기념할 가치가 있는 4·3, 우리 후손들에게 함께 전해줄 4.3”



@어딘글방&창밖은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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