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를 보여줄게요.

광장의 한복판에서

by 여름이

눈이 올 예정은 아니었지만, 나가기로 했다.

(https://brunch.co.kr/@yeoreumi25/28)


피켓을 들고 머리와 어깨에 눈이 쌓이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싶었는데 회사원 신분이라 평일은 어렵고, 또 쉬는 날에 맞추어 눈이 오는 것까지 기다리다가는 해보지도 못하고 겨울이 지나갈 것 같았다. 가능한 주말 일정을 찾아 2주 후(2/21, 토) 실행하기로 다짐했다. 곧바로 협회 단톡방과 카페에 1인 시위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넌 이제 도망갈 수 없어.' 스스로를 독려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장소는 광화문 광장. 서울역도 많이 추천을 받았는데 종종 가는 곳이라서 그럴까? 오히려 머뭇거리게 되었다. 애초에 생각한 대로 청와대에서 가까운 광화문으로 가자. (처음엔 청와대를 생각해서 답사를 갔었는데 거긴 사람들이 생각보다 너무 없었다.)


시위 이틀 전. 필라테스를 하고 온 날이었음에도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운동 후 마신 커피 탓을 하기에는 난 커피를 마셔도 잘 자는 체질. 이날은 결국 잠들기를 포기하고 밤을 새 버렸다. 다음날도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난 담담하다고 생각했는데 몸은 아니라고 말하는 걸까.


드디어 당일. 1인 시위이긴 했지만 법개정안 작업을 함께하고 있는 두 회원분이 함께 해주시기로 했다. 그리고 협회 대표님도 오셨다. 멀리 대구에서 기프티콘을 쏴주신 회원분까지. 정말 용기백배. 상투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절실히 와닿았다. 그분들이 계시지 않았다면 아마 난 시작도 못했을 거다.


날씨는 극적인 이미지를 원했던 나의 바람과 달리 갑작스레 너무 포근하고 맑았다. 시위 전에 다 함께 카페에서 대구 회원분이 보내주신 기프티콘 커피와 케이크로 요기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창밖으로 반팔과 반바지를 입고 지나가는 외국인 커플이 보였다. 어쩌면 날씨가 내게 베푼 배려일지도.


커피를 다 마시고 드디어 광장으로 나갈 시간. 건너편에는 태극기 부대의 시위 무리가 보이고, 고성이 들렸다.

나는 이순신장군상을 둘러싼 구조물의 끄트머리, 건널목 근처에 자리 잡았다. 피켓을 들고 오니 몇 년 전 법원 앞에서 시위를 하셨던 회원분 말씀대로 바로 경찰이 다가왔다. 1인 시위를 한다고 하니까 어디서 나왔는지, 혼자인지 물으시고 피켓을 잠깐 보시고는 알겠다고 하며 떠나셨다. 일상적이고 친절한 느낌이 역시 시위의 꽃밭 광화문 광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이 좋지 않아서 선글라스를 썼는데 그래서 그런가 가면을 쓴 것처럼 용기를 더해 주었다. 사람들의 시선과 나의 시선을 서로 가려주어 마음의 부담을 덜 수 있었다. 지나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볼 수 있어서 시위의 지루함도 달랠 수 있었다.


30분쯤 지나니 옆에서는 태극기 부대이면서 교회에서 나오신 분들인 것인지 익숙한 찬송가도 들려왔다. 내가 좋아하던 찬송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바라는 세상과 당신들이 바라는 세상은 아마도 많이 다를 텐데 나의 하나님(신)은, 당신의 신(하나님)은 어떤 세상을 바라실까? 같은 목소리(성경)를 보고도 이렇게 다른 목소리를 내는 우리는... (나는 현재 이 땅의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몇 년에 한 번 정도 가는 정도.)

내가 든 피켓에 적힌 목소리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어느 여성분께서 다가오셔서 보시더니 이건 개인의 문제 아니냐고 하셨다. 법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니냐.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야기를 하셨다. 예상했던 일이긴 했다. 그런 인식을 바꾸기 위해 나온 거니까. "아동인권의 문제이고, 양육비처럼 사회의 문제예요.", "양육비는 다르지. 그건 사회문제가 맞지만 아이를 보는 건 법대로 보면 되잖아.", "그게 안돼서 제가 여기 나온 거예요."

사실... 처음 아이를 볼 수 없게 되었을 때는 가슴이 무너지는 말이었겠지만, 지금은 괜찮다. 얼마든지 이야기 나눌 수 있어. 이건 어른의 문제만이 아니라 아동(인권-부모 모두에게 사랑받을 권리)의 문제이기도 하다고요. 아니 그게 가장 중요해요.*

상처의 말이라 할지라도 관심을 가져주시는 것 자체로 감사했다.

이순신 장군님의 가호를 받으며


그렇게 한 시간이 조금 넘게 서있다가 협회 대표님과 두 회원분 모두 다 함께 점심을 먹었다. 식사와 담소로 힘을 채우고, 다시 시작해야지. 이번엔 세종대왕님 앞에서! 제가 바라는 세상을 당신도 흐뭇해하시겠죠? 여기는 광화문 광장의 중간 지점으로 이순신장군상 앞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넓은 벌판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랄까. '광장'이라는 단어가 눈앞에 있었다.


이번에는 연세가 있으신 남성분이 다가오셨다. 먼저 문구에 대한 지적부터. "이게 무슨 소리인가 했어. 그래서 면접교섭을 없애자는 거야 뭐야?, 이렇게 쓰면 어떻게 알어?", 이어서 역시 익숙한 반응의 이야기들. "법대로 하면 되잖아? 이렇게 혼자 나와서 하는 게 의미가 있어?" 등등. 꽤 오랫동안 법적인 문제나 사회 인식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근처에 머물며 함께하던 회원분 중 한 분도 오셔서 같이 이야기를 해주셨다. 어르신과의 대화는 내가 여기 나온 이유이기도 했고, 문구에 대해 수정하고 싶었는데 그 방향에 대해서도 더 고민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시위 시간이 금방 지나갈 수 있기도 했다.


이번에는 세종대왕님 앞에서


조금씩 햇빛이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이제 슬슬 마무리하시죠?

조금 더 할게요. 여기 끝나고 온 김에 근처니까 청와대도 잠깐 가보죠? 5분, 10분 정도만 있다가 끝낼게요.


가자, 청와대!

두 곳에 걸쳐 1인 시위를 하고 나니 좀 더 용기가 생겼다. 그리고 함께 해주시는 회원분들도 계시고.

피켓을 그대로 메고 걸어가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사람들이 보았으면, 그게 어떤 반응이던 알리고 싶었다.

피켓을 메고 광화문에서 청와대로 걸어가는 길


나중에 사진을 찍어 주셨던 회원분께서 뒷이야기를 들려주시길, 걸어가는 동안 젊은 커플이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 아저씨 바람피워서 애들을 못 보나 봐"

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이런 비슷한 반응은 자주 듣던 거니까. 당신이 뭘 잘못했겠지. 애가 싫다는데 왜 보려고 해. 당신이 이기적인 거 아냐? 등등

언젠가 알게 되겠지.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왜 좋아하던 아이들이 갑자기 거부를 하게 되는지, 왜 법은 무기력한 지, 우리 사회는 아동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아동학대나 양육비 문제가 계속되는 현실은 '나의 문제'가 가야 할 길이 얼마나 먼지 알려주고 있었다.


그렇게 청와대에 가까워질 무렵 나의 어깨에 걸린 피켓을 보고 역시 경찰이 다가왔다. 몇 가지 질문을 하고 1인 시위를 한다고 하니 친절하게 어디(청와대 앞 분수대)로 가서 어떻게 하면 된다고 안내를 해주셨다. 도착하니 다시 청와대 직원이 와서 이름과 나이, 소속 등 인적사항을 물어보고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보고를 해야 하는 듯했는데 나중에 회원분은 사찰 대상이 된다고도 하시고, 하지만 뭐가 되었든 나로서는 환영이었다. 대통령에게라도 보고가 들어가면 좋겠지만 누 구던 간에 조금이라도 알면 좋은 것이고, 내 행적을 오히려 감시한다 해도 내가 어떤 일을 벌이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으니까 그래 난 좋아. 나 스스로를 다잡는 동기가 되기도 하니까.


당신이 한마디 해준다면 조금 더 빨리 우리가 아이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해가 저물 시간이 다가오고, 끝까지 함께 해주신 두 회원분들의 컨디션이 좋은 것은 아니었기에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의 1인 시위는 짧게 끝냈다.


나 혼자였으면 하지 못했을 1인 시위. 감사한 분들의 도움으로 한 걸음을 떼었고,

우리는 바로 다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To Be Continued...




*참고 - 유엔아동권리협약 (http://incrc.org/uncrc/)

3조 2항 - 당사국은 아동의 부모, 법정대리인 및 기타 아동에 대해 법적 책임이 있는 자의 권리와 의무를

고려하여 아동의 웰빙에 필요한 보호와 돌봄을 보장하고, 이를 위해 모든 적절한 입법적·행정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

7조 1항 - 아동은 태어난 즉시 출생등록되어야 하며, 출생 시부터 이름을 갖고, 국적을 취득하며, 가능한

한 부모를 알고, 부모에게 양육받을 권리가 있다.

9조 3항 - 당사국은 아동의 이익에 반하는 경우 외에는 부모 중 한 명 또는 부모 모두로부터 분리된 아동

이 정기적으로 부모 모두와 개인적인 관계를 갖고 만남을 유지할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아마도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겠지. 당신이 아이를 만나는 건 '아동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라고. 가장 자의적인 판단이 지배하는 영역이다. 또한 매우 사회/문화적인 부분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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