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여름이라고 합니다. ‘여름’이 아니라 ‘여름이’에요.”
예전부터 오래도록 사용하던 별명이 있지만 2년 전부터는 ‘여름이’라는 별명을 사용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목적의 모임이라고 생각될 때는 여전히 이전 별명을 사용하지만,
대부분의 공개적인 모임들, SNS나 누리집을 통해서 참여하게 되는 검색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는 모임에서
나는 ‘여름이’다.
여름이는 상상 속 세 친구의 이름 중 하나다.
여름이, 겨울이, 털실이
각각 고양이, 강아지, 쇠똥구리인 친구들의 이름이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고양이 친구의 이름이기도 하고, ‘여름’이 들어간 이름이기도 한.
그렇게 나의 새로운 별명이 되었다.
‘여름이’ 답게 여름의 더위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며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는 자기 합리화이고....
그냥 버텼다. 에어컨을 틀지 않고. 사실 전기세가 이유였다. 무분별한 소비생활(술과 책)을 보조하기 위해 전기세라도 아끼자는 마음. 그렇게 내 인생 가장 무더운 여름을 맞이했다.
낮에는 가만히 있어도 땀이 뻘뻘 흐르는 집. 선풍기도 없어서 공기청정기가 선풍기를 대신했다.
그런데 막상 버티고 보니 의외였다. 더운데 견딜 수 있었다. ‘어라? 살만한데?’
어쩌면 윗집과 아랫집이 있어서 사이에 있는 우리 집이 온실처럼 뜨거워지는 것을 막아주었을지도 모른다. 한밤의 열대야도 헐벗고 자면 나름 땀에 젖지 않고 잠들 수 있었다. 또한 군대를 다녀온 이후 호전된 아토피도 여름의 고통을 덜어주었다. 그렇게 6월, 7월을 버텼다.
하지만 결국 8월에는 지고 말았다. 이제 그만하면 고생했어. 그렇게 무더위를 온몸으로 겪어내고, 여름의 마지막은 에어컨 바람의 시원함으로 지친 몸을 달래며 가장 더웠던 여름과 안녕했다.
그동안 여름은 견딜 수 없이 힘들어했던 기억으로만 남아있었는데...
맘먹고 견디면 할 수 있잖아. 쓸데없는 자신감이지만 아낀 전기세 말고도 얻는 것은 있었다.
그렇게 여름이 괴로움이 아니라 견딜 수 있는 계절이 되자
여름의 하늘, 여름의 소리, 여름의 모든 풍경이 새롭게 나를 감싸 안았다.
선명한 하늘, 노을조차 더 진해 보이는 하늘. 귓전을 때리는 매미 소리, 짙은 초록, 새들의 지저귐, 익숙한 또는 낯선 형형색색 다채로운 모습의 꽃과 곤충들.
그냥 길을 걷다가 하늘과 구름이 여름처럼 선명해 보이면, 길가의 꽃들이 유난히 눈에 들어올 때면,
이런 곳에서도 싶을 장소에 열심히 싹을 틔워내는 풀들을 만날 때마다
수시로 핸드폰의 카메라를 열어 담아두었다.
언젠간 네가 좋아하는 이 여름의 풍경을 함께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여.
가을이 되었지만, 아직 ‘여름’은 끝나지 않았다. 자주 가던 ‘책읽는고양이’ 북카페의 북토크 책들이 아직 여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알림을 보자마자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일정을 확인할 필요도 없이 신청 버튼을 눌렀다.
단지 여름이라는 단어 하나가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가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마침 작가님의 시집도 찾아봤는데 여름을 앞둔 제목인 데다가 여름을 품은 제목의 시가 가장 많았다.
늘 그렇듯 북토크가 끝나고 사인을 받았다.
최지은 시인
<우리의 여름에게> ‘아주 보드라운 당신의 돌멩이’
<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 ‘내가 사랑하는 것만이 곁에 남아요’
그냥 우연이겠지만, 나에게는 운명 같은 문구였다.
‘아주 보드라운 당신의 돌멩이’라고 적어주신 문구는 너와의 기억을 소환했다.
너와 함께 자연으로 돌려주기로 한 *‘다정한돌’은 너와 헤어지면서 여전히 나에게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만이 곁에 남아요’
정말 그럴 수 있을까요? 저의 이 마음은 정말 ‘사랑’일까요?
다음 달의 북토크도 분명 여름이 주제는 아니었으나 여름을 담고 있었다.
한정원 시인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 ‘여름이님의 편’ (p42 “여름은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이다.”)
<시와 산책> ‘여름이님, 같이 걸어요’ (p57 여름을 닮은 사랑)
네 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은 바로 ‘여름’이었다. 예전의 나처럼.
내가 좋아하는 시와 산책이 제목인 작가님의 다른 책도 준비했다.
‘내 편이 되어주고 같이 걷자는’ 말은 때마침 고민 속에서 새로운 싸움을 앞둔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두 분의 시인을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다시 여름이 돌아왔다. 이번에는 책들이 나를 유혹했다. 안식처가 되어준 독서로 인해 밀려드는 정보도 책에 대한 것들이 많아졌다. 그렇게 우연히 화면에 뜬 ‘여름 큐레이션’
그러면서 여름이 들어간 책을 무작정 찾아보기 시작했다.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여름’이 들어간 것이 중요했다. 그것만으로도 살 이유가 되었다.
<결혼. 여름> 알베르 카뮈
<바깥은 여름> 김애란
<여름 안에서> 성률
<여름의 비행운> 이혜령
<여름 문구사> 이지언
<너무나 많은 여름이> 김연수
<여름 언덕에서> 세계문학단편선 '여름 별장에서' 안톤 체호프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안희연
<여름에 내가 원한 것> 서한나
<시의적절 6월 좋음과 싫음 사이> 서효인
<시의적절 7월 잠시 작게 고백하는 사람> 황인찬
<시의적절 8월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 한정원
<우리의 여름에게> 최지은
<주게무의 여름> 모가미 잇페이
<여름밤 해변의 무무 씨> 조해진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 이희영
<소설 보다 : 여름 2025> 김지연, 이서아, 함윤이
<첫 여름, 완주> 김금희
<무더운 여름> 위화
<일억 번째 여름> 청예
<아무튼, 여름> 김신회
To Be Continued...
주로 차를 타고 이동하는 너에게, ‘집으로 가는 길’을.
나와 있을 때는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다른 경험을 나눠주고 싶었어. 나에게는 10분의 거리, 얕은 오르막.
“금방이야. 천 걸음만 걸으면 돼.”
“언제 나오는 거야?!, 천 걸음 아직 안 됐어?”
힘겨워하며 짜증을 내는 너에게 ‘미안, 내가 실수했네. 너에게는 천 걸음보다 더 먼 거리인데.’
“미안, 거의 다 왔어. 저기까지만 안아줄게.”
사실은 내가 더 널 안고 싶었기에.
조금만 안아줄게.
그렇게 오전의 여름볕 아래 함께 땀을 흘리며 도착한 ‘내가 사는 집’
내가 사는 곳이라는 말에 넌 작고 허름한 건물을 보고 입구에 들어서면서 ‘녹슨 집’이라고 표현했지.
그런데 난 그 말이 왠지 좋았어.
그리고 들어간 자그마한 집. 둘이 누우면 가득 차는 자그마한 방.
너를 위해 네가 좋아할 것들을, 네게 보여주고 싶은 것들을 채워 넣은 공간.
“녹슨 집인데 안은 풍성하다.”
너의 말은 나의 마음에 박혀 낡은 이 집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지.
그리고 바로 그 계절.
너와 함께 밤을 보낸 그 여름.
네가 여름에 태어났을 때,
처음 너의 모습을 보고 그 작은 존재를 품에 안기도 전에 넌 인큐베이터에 들어갔지.
난 그게 당연한 줄 알았어. 유리창 안에 누워있는 너를 보며 그저 신기하고, 사랑스러웠지.
하지만 닿을 수 없어 안타까웠고, 빨리 널 만나고 싶었어.
한 주가 지나고 꿈에 그리던 널 만날 수 있었어. 하지만,
너를 제대로 안기도 전에 난 출장으로 다시 너와 떨어질 수밖에 없었어.
그렇게 너와의 첫여름은 너를 볼 수 없었던 기억으로 남았지.
집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난 널 주말에만 볼 수 있었어.
너와 있는 시간만큼은 온종일 너와 함께 있고 싶었어.
그냥 그랬어... 그것조차 쉽지 않았지만...
그리고
내가 살기 위해, 그리고 널 위해(서라고 생각했던) 결단을 내렸을 때
우리가 만나는 시간은 달라지지 않을 거로 생각했어.
그건 정말 순진한 생각이었지.
그렇게 다시 너를 볼 수 없는 시간이 늘어가는 동안
나에게 남은 건 “여름이 제일 좋아.”라는 너의 목소리. 네가 태어난 날의 숫자와 계절의 기억.
그렇게 그 기억은 머릿속을 점점 채워갔고, 나에게 계절은 여름만이 의미가 되었어.
내가 가장 힘들었던, 싫어했던, 네번째로 사랑했던 계절은
내게 가장 아름다운, 좋아하는, 첫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이 되었지.
그렇게
너의 부재가 커질수록
너의 기억이 뜨문뜨문, 힘을 잃어가는 모스부호 구조신호처럼, 희미해질수록
여름을 향한 나의 사랑은 집착이 되어간다.
*'다정한 돌'은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에서 전시되었던 관객 참여 작품으로 남한강의 조약돌(인간에 의해 사용당하는)을 관객들이 집어가 다시 자연으로 배달해주는 작품입니다.
@어딘글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