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니크리켓 _인터뷰 중에>
처음 그를 알게 된 건 여름글쓰기, 이열쓰열에서였다.
내가 말하고 싶었지만 정리하지 못한 마음을 누군가 먼저 문장으로 건네주었을 때의 기분.
시원했고,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공감이라는 말보다 조금 느린 감정, 알게 모르게 스며드는 유대 같은 것.
한 계절이 지나고 나자, 나는 그 사람이 더 궁금해졌다.
지미니크리켓은 자신의 사유의 시작을 ‘포착’이라고 말한다. 무언가를 빨리 이해하는 쪽이 아니라, 다음 장면으로 쉽게 넘어가지 않겠다는 태도.
어릴 적부터 세상에 늘 반 박자 늦게 도착하던 자신을 그는 오히려 자신의 방식이라 부른다. 그래서 그의 문장에는 늘 멈춤이 있고, 그 멈춤이 곧 바라봄이 된다.
요즘 그가 즐겨 마시는 것은 말차다.
첫맛은 달고, 곧 쓴맛이 올라오는 맛. 그는 그 조합을 좋아한다. 인생도 그렇다고 말한다. 너무 달기만 하면 금세 괴로워지지만, 쓴맛이 곁들여질 때 단맛도 비로소 제맛을 낸다고. 실패와 실수, 가로막힘과 진부함을 낯설어하지 않게 된 이유도 그쯤에 있다.
그는 계절을 유심히 바라보는 사람이다. 달력보다 창밖의 공기를 먼저 믿고, 마음의 기후가 바뀌는 때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아무리 봄이 와도 마음이 아직 겨울이면, 그 사람의 계절은 아직 겨울이라는 말. 그래서 그는 창밖의 계절과 마음속의 계절을 함께 본다. 이불 커버를 바꾸는 시기, 회집 앞 제철 생선 메뉴판,
밤공기의 습도 같은 것들로 계절을 감각한다.
글쓰기를 시작한 것은 사회생활 이후였다.
처음에는 아무도 상처 주지 않을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아주 작은 세계에만 문장을 올렸다.
그는 말한다. “그 어떤 관계라도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기준이 자신에게 있다고. 글은 그에게 자신을 보여주는 가장 안전한 방식이었다.
“나 이런 사람이야.” 그 말 한마디를 대신해 주는 도구.
영감은 대개 타인의 문장과 마음에서 온다. 누군가의 글 위에 자신의 마음이 겹쳐질 때, 그는 그것을 ‘초록’이라고 부른다. 생명의 색. 표현되는 순간 살아나는 색. 그래서 그에게 글감은 늘 초록이다.
한 편을 쓰기 직전의 감정은 ‘정적’에 가깝다.
그는 침잠을 좋아한다. 심심함과 외로움, 고독과 잔잔함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 오래 머무른다. 사실은 외로운데 심심하다고 말하고, 사실은 고독한데 평안하다고 말하는 마음의 착각들을 그는 꽤 잘 알고 있다.
그의 문장에는 늘 절제가 있다. 진심이 있지만, 쏟아내지 않는다. 넘치지 않게, 오버하지 않게.
밤마다 하루를 되돌아보며 혹시 자신이 지나치지는 않았는지, 타인을 불편하게 하지는 않았는지 다시 점검하는 사람이다. 그가 스스로에게 건네는 설정은 단순하다. “나는 한낱 미물이다.”
절대자가 있고, 우리는 만들어진 존재라는 인식.
그 울타리 안에서 그는 사람의 범위를 넘지 않으려 한다.
올여름, 그는 첫 시집을 내었다. 여섯 명이 함께 묶은 공저 시집 〈빛에 젖은 여름〉. 그의 대표시는 ‘상온의 눅눅함’이었다. 매미, 장마, 긴 노을, 잦은 샤워. 눅눅한 여름의 물성을 통해 일상의 정체와 내면의 고립을 촉각과 후각의 이미지로 담아냈다.
시집을 내고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자신감이 아니라 부끄러움이었다. 그는 몇 번이나 철수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꺼냈다. 초보자이기에 오늘이 어제보다 낫다는 믿음 하나로.
시를 쓸 때 그가 지키는 기준은 명확하다. 딱 ‘본 길이만큼만’ 간다. 앞은 시인의 시선이지만, 그 너머는 독자의 몫으로 남긴다. 논리는 최대한 끌고 오지 않는다. 마음이 식기 전에 단어를 조형하는 일, 감정이 식기 전에 형태를 만드는 일. 그는 그것을 유리공예에 비유한다.
지미니크리켓 〈시인의 처서〉 중에서
*한때는 매미가
사람보다 계절을 더 잘 아는 줄 알았다
지금은
지금은 누가 계절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날개 달린 나무껍질이 떨어진다
낙엽처럼, 꺼진 별처럼
바닥에 쾅쾅 부딪힌다
사실 계절은 바깥의 온도가 아니라
사람이 만든 마음의 기후이니
누가 내 안에 머무는지 따라 철이 간다*
그는 이 시를 통해,
“계절이 바뀌었어도 마음은 아직 여름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자신의 순간을 조용히 고백했다.
지미니크리켓의 글에는 늘 거리감이 있다. 애정하되 휘둘리지 않고, 바라보되 침범하지 않는 거리. 그는 그 거리의 비밀을 곤충에게서 배웠다고 말한다. 너무 가까우면 도망가고, 너무 멀면 보이지 않는 존재들. 오래 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애정과 조심성의 균형이라고.
그가 오래 바라보는 것은 정적 속의 ‘멍’이다.
신발장 불이 꺼질 때까지 서 있기, 욕조의 물이 작은 원을 그리며 사라지는 장면, 노을이 거실 벽을 타고 천천히 오르는 순간. 그는 그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 속에서 오래 머문다.
요즘 그가 가장 자주 들여다보는 것은 댓글이다.
콘텐츠보다 사람의 반응이 더 재밌고, 더 날것이라서. 집에서는 시집과 소설을 병렬로 읽는다. 여전히 여름을 좋아해서, 패딩을 입고 여름 시집을 펼쳐보는 사람.
그가 다른 사람의 글에서 가장 먼저 보는 것은 ‘단어’다. 논리보다 먼저 끌고 온 단어들. 조합과 배열. 그래서 그는 새 단어를 알게 될 때마다 기뻐한다.
그를 지금까지 끌고 온 문장은 이것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해보긴 하자.”
글을 좋아하다가, 출간까지 오게 된 단순한 문장.
더 깊어지고 싶은 방향은 뜻밖에도 ‘변하지 않는 것’. 누군가 자신의 눈에 빛이 난다고 말해준 적이 있었고, 그는 지금도 그 빛이 남아 있기를 바라며 글을 쓴다.
덜어내고 싶은 것은 완벽주의와 마지막에 숨는 버릇. 중간 지점에서도 충분히 꺼내도 된다는 것을,
이제는 자기 자신에게도 허락해 주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이 글을 읽는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닿는다.
“자기에게 주어진 고유한 것을 찾아내고, 좋아해 보세요. 그 고유함에 맞는 사람들이 분명히 모여듭니다.”
어쩌면 우리가 여전히 글을 놓지 못하는 이유도,
각자에게 주어진 그 고유한 결 하나 때문일 것이다. 빠르거나 느리거나, 드러나 있거나 숨겨져 있거나.
지금 어디에 있든, 여전히 쓰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같은 페이지 어딘가에 있다
덧) 지미니크리켓 님의 브런치에 있는 시도 너무 좋아서 내 마음대로 소개한다.
https://brunch.co.kr/@adf6ec453157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