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엄마 예행 연습 시켜준 거야?

by kami

나는 슬픔 앞에서조차 무너지지 않는 척하는 사람이었다.


왜 그날따라 하필 하얀 바지를 입었는지 모른다. 학교 도서관에 있을 온유를 만나기도 전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이 손바닥을 타고 내려왔다.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 문을 닫고 숨을 들이켰다.


첫째 때는 양수가 터지기 전 제왕절개를 했었다. 몸이 무언가를 흘려보낸다는 기이한 감각은 처음이었다. 몸속 어딘가의 문이 열렸고, 흐르기 시작했다.


마음이 깊은 수조처럼 가라앉았다. 말도 안 되게, 내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은 기도였다. 체념과 감사가 구분되지 않은 채 한 덩어리로 흘러나왔다. 항복한 채로, 나는 다시 도서관을 향했다. 입은 바지는 여전히 말끔했지만 내 얼굴은 십 분 전의 내가 아니었다.


도서관에서 낄낄대며 만화책을 보는 온유와 눈이 마주쳤다. 한 번 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온유는 차에 타자마자 배가 고프다며 내가 주사위 모양으로 잘라 둔 수박을 부지런히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달다며 입을 오물거리는 동안에도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말했다.

“온동이가 위험한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아. 엄마는 빨리 병원에 가야 해.”

온유는 아무 걱정하지 말라며 다시 수박 한 입을 베어 물었다. 차 안엔 수박 씹는 소리뿐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입원 가능성에 대비해 가방을 챙겼다.


어쩌면 오늘 혼자 밥을 먹을 온유를 위해 재빠르게 저녁도 준비했다. 작은 가방을 들고 병원으로 향하며 최대한 멀쩡한 척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편 역시 바로 출발한다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두 달 전, 온동이를 처음 만났던 병원에 도착했다. 인도네시아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방금 전 학교 화장실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처음엔 스스로 찾아왔다는 이유로 응급이 아니라고 했던 간호사도 내 말을 다 듣고 나서야 움직였다. 온동이 담당인 로버트 박사님은 출장 중이라고 했다.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빨리 와주기만 한다면.


금발의 의사가 커피잔을 들고 나타났다. 태연하게 나에게 잔을 건넸다. 온몸이 떨렸지만 정중하게 거절했다. 웃음기 섞인 인사로 감정을 눌러 담은 내가, 그 순간 유령 같았다.


다시 상황을 차분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또다시 출혈이 시작되었다. 간호

사가 입을 틀어막으며 소리를 질렀다. 의사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료의자에서 산모용 검진 의자까지 부축을 받으며 이동했다.


초음파 기계를 작동시키던 의사는 가망이 없을 거라고 고개를 저었다. 도저히 초음파 화면을 볼 자신이 없어서 눈을 감았다. 그런데 차 안에서 들리던 온유의 수박 씹는 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쿵. 쿵. 쿵—


내 가슴의 박동을 세던 순간이었다. 다시, 쿵. 쿵. 쿵.
화면 속에서 뭔가가 움직인다고, 의사가 말했다. 여전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휴지곽을 내 옆에 건네주던 간호사도, 초음파를 들여다보던 의사도 기적이 일어났다며 환호했다.


윙— 기계소리, 간호사와 의사가 나를 흔들며 눈을 뜨라고 말하는 소리들이 한데 섞여 멀어졌다. 아득했다. 눈을 언제 떠야 할지 몰랐다. 그때 내 이름을 부르는 따뜻한 목소리가 들렸다. 병원에 막 도착한 남편이었다.

의사는 온동이는 아주 건강하다고, 출혈의 흔적도 없다고 말했다. 모든 것이 정상이라고.


그제야 눈물을 쏟아냈다. 살아준 온동이에게 고마워서. 방금 전까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있었던 것이 미안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음속으로 담담히 이별을 준비했었다. 이제는 “안 됩니다. 제발 우리의 온동이를 데려가지 말아 주세요.” 납작 엎드려 매달리는 기도가 터져 나왔다.


나는 그 아이를 간절히 원했다. 그런데도 너무 쉽게 보내주려고 했었다. 담담한 척, 괜찮은 척, 익숙한 방식이었다.


어릴 적 엄마와 시장에 가서도 그 흔한 핫도그 하나 사달라는 말을 못 했던 아이여서 그런가. 속으론 늘 참는 쪽이었고 겉으로는 늘 괜찮은 척했었다. 원한다고 말할 줄 몰랐고, 가질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포기해버렸다. 온동이는 그렇게 쉽게 내려놓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오래전부터 몸에 밴 ‘괜찮은 척’을 조금씩 놓아주게 되었다. 울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고 있던 내가 울음을 터뜨렸던 순간처럼, 슬프면 슬픈 대로, 두려우면 두려운 대로, 내 안에 일어나는 감정을 다듬지 않고 마주하는 법을 배웠다.


어쩌면 그날은 온동이와의 이별을 준비하는 예행연습이었지만, 동시에 진짜 나 자신으로 살아내는 예행연습이기도 했다. 마음은 언제나 머리보다 먼저 움직인다. 예측은 침착했지만, 몸은 울었고, 기도는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 마음을 억누르지 않고 받아들이는 연습, 그 처음을 온동이가 내게 남겨주었다.


오랜만에 그날 입었던 하얀 바지를 다시 꺼내 입어봐야겠다. 흔들릴 때마다 그날의 울음을 꺼내어 조심스럽게 껴안아본다. 끝인 줄 알았던 그 울음은, 온동이가 남긴 새로운 시작이었다.

오늘은 온동이가 아주 많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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