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봄날
어릴 적, 우리 가족은 봄이 오면 진해 군항제로 향했다. 벚꽃놀이 전날에 엄마는 어김없이 새 옷을 챙겨주셨다. 프릴이 풍성하고 진주 단추가 달린 블라우스, 감색 청치마, 하얀 양말스타킹까지 갖추면, 나는 마치 봄날 무대에 올라선 아이 같았다.
그날만큼은 누구도 다투지 않았다. 찰나였지만, 봄은 우리 가족이 서로를 조심스럽게 대하던 멈춤의 시간이었다.
자카르타에는 봄이 오지 않았다. 사계절 없이 흘러가는 날들 속에서, 봄은 늘 어딘가 멀리 있는 계절이었다. 유독 봄이 되면 마음이 헛헛했다. 마치 중요한 약속을 잊고 지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온유는 벚꽃이 흐드러진 길을 걸어본 적이 없었다. 바람도, 색도, 향도 책과 노래를 통해 상상으로만 익혀야 했다.
마침 자카르타에 열흘짜리 긴 연휴가 있었다. 나는 검진을 핑계 삼아 한국으로 향했다. 여름이 아닌 봄의 한국은 딱 십 년 만이었다. 온유는 그 모든 게 동생 덕분이라 했다. 여행이 확정된 그날부터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봄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었다.
한국의 병원 문 앞에서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처음 만나는 여의사 앞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의사는 초음파를 오래 들여다보다가, 아무 이상 없다며 안심시켜 주었다. 며칠 전 도서관 화장실에서의 있었던 하혈 이야기를 꺼내자,
“기적이에요. 이왕 오셨으니 이번 봄, 실컷 누리고 가세요. 아기가 벌써부터 효도하네요”라며 웃었다.
그날, 자카르타에서 함께 육아하던 친구들이 모였다. 암투병 중인 친구는 가발을 쓰고 먼 길을 달려왔다. 누구는 말없이 배에 손을 얹고, 누구는 익숙한 농담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토록 오랜만이었지만, 금세 우리는 한 계절 안에 포개어졌다.
우리는 각자 생일이 다른 계절에 있어 ‘포시즌’이라 불린다. 나는 3월이 생일이라 봄을 맞고 있고, 그날 가을을 맞은 친구가 말했다.
“온동이가 우리 다 불러냈네.”
친구들과 시간을 보낸 뒤 우리는 석촌호수로 향했다. 벚꽃은 때마침 절정이었다. 꽃잎은 바람 없이 조용히 우리들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연극무대처럼 정교하게 짜인 장면 같아, 오히려 현실 같지 않았다.
온유는 빙글빙글 돌며 벚꽃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딸기우유 송이다!” 하고 외치며,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 모습을 한 장면도 놓치고 싶지 않아 동영상으로 카메라에 담았다.
온유는 “이게 봄이구나!” 하며 처음 맞이하는 봄을 그대로 품었다. 그 후 자카르타에 돌아와서도 그날의 잔향을 곱씹으며 친구들에게 봄을 자랑하곤 했다. 한국의 딸기를 매일 먹었던 이야기, 떨어지는 벚꽃 잎을 잡느라 공원을 뛰어다닌 것, 동생 덕분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덩달아 축하를 받은 이야기 등 한동안 우리 집은 봄의 따스함으로 채워져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봄이 지나고, 온동이는 어느새 우리 곁을 떠났다. 자카르타에도 다시 봄이 찾아왔다.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비가 내렸다. 우리는 조용히 그 계절을 통과했다.
작년 그날의 영상과 사진을 꺼내 보면, 온유도 나도 마치 다른 사람 같다. 온유의 웃음도, 내 얼굴의 빛도 지금은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다.
돌이켜보면 그해 봄은 온유에게는 첫 번째 봄이었고, 온동이에게는 마지막 봄이었다. 그 계절은 그 아이의 시간이기도 했다.
온동이는 어쩌면 그때부터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길지 않다는 걸. 그래서 더 정성껏, 더 깊이, 우리가 평생 꺼내볼 수 있는 찬란한 장면들을 남기고 간 건 아닐까.
그해 봄은 어딘가에 닿기 위해 조용히 피고 진 하나의 문장이었다. 우리는 그 안을 걸었고, 아이는 자신만의 순서로 쉼표를 남겼다. 바람은 지나가고 꽃잎은 져도, 그날의 온도는 아직 마음 안쪽에서 천천히 맴돈다.
어떤 장면은 반복해서 떠오르지 않아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게 오래도록 남아, 어쩌다 불쑥 웃음을 꺼내주고, 가만히 삶의 결을 다시 만져보게 한다. 아주 짧은 계절이었지만, 충분히 선명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