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학 리뷰 | 장-마르크 스테베,《집 없는 서민의 주거권》
질문을 하나 던진다. ‘여러분은 어떤 곳에 살고 있습니까?’ 저마다 살고 있는 지역도, 주거 형태도 가지각색일 것이다. 인간 삶에서 필수적인 요소를 세 가지 꼽으라고 한다면 백이면 백 의식주를 말할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어떤 공간에서 살고 있냐는 질문은 먹고 입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어떤 형태든 모든 나라에는 ‘주거문제’가 있다. 전 세계적으로 불황을 겪고 있는 지금 주거문제는 더욱 심화하고 있다. 한국도 물론 주거문제로 신음 중이다. 최근 가장 뜨거운 감자가 된 건 전세사기다. 이외에도 수도권 인구 과밀과 그로 인한 주택 부족, 집값 폭등과 폭락 등은 모두 우리네 삶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청년층이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현재 청년사회에는 집값이 너무 올라 내 집 마련의 꿈은 먼 나라 이야기가 됐다는 체념이 지배적이다. 대학가에는 원룸에 가벽을 설치해 말 그대로 공간을 쪼개서 임대하는 불법개조 원룸이 판친다. 이러한 불법개조 원룸은 비좁을 뿐 아니라 소음에 취약하고, 화재와 같은 각종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지난해엔 기록적인 폭우에 서울 관악구의 한 반지하주택이 침수되어 일가족이 생명을 잃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반지하 주거공간의 취약성과 위험성에 대한 논의가 불거졌다. 정부도 반지하주택에 거주하는 가구를 이주시키겠다는 정책을 세웠다. 그러나 반지하주택의 인기는 여전하다. 불경기에 집값이 하락세를 달린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중산층 이상에 해당되는 얘기다. 여전히 서울 집값은 비싸고 싼값에 나온 반지하주택은 집을 구하는 이들에게 좋은 선택지다.
주거문제는 우리가 당면한 ‘현실’이다.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집을 구하기 어려워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살아가거나, 혹은 아예 주거공간을 점유하지 못하기도 한다.
주거문제에 국민의 관심이 쏠리자 지난 대선에서는 후보들이 ‘부동산 공약’을 앞 다퉈 발표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민간과 공공을 가리지 않고 임기 5년간 250만 가구 이상을 공급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정치권에서 나오는 다양한 부동산 공약은 서로 세부사항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비슷하다. 일단 ‘공급’을 늘리겠다는 게 골조다.
하지만 주거문제가 과연 공급만으로 해결될까?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 이유로 사람들은 계속해서 수도권에 몰리고 있다. 제한된 공간에 무작위로 주택을 세우려다 보면 개별 주택의 주거환경이 미흡해질 뿐 아니라, 도시 경관에도 악영향을 미치며, 이는 또 다시 주거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
그저 내 몸 하나 뉘일 공간만 있다면 우리는 충분히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주거’란 정말 단순히 ‘발붙일 공간’이 있고 없고의 문제일까. 주거문제의 해법은 어디에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하던 차에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의 제목은 《집 없는 서민의 주거권》 . 부제는 ‘1789년부터 현재까지 프랑스 사회주택의 역사’로, 프랑스의 사회주택 정책사례를 분석한 책이다.
프랑스에서는 19세기 말 산업화를 맞이하며 농업, 장인 등 전(前)산업화 시대의 생산구조가 사라지고, 제조업 분야가 성장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기존에 농사를 짓던 소농과 손수 생산품을 제작하던 장인 등은 대부분 공장노동자가 되었다. 금융자본은 공장이 신설되는 도시에 집중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인구 역시 농촌을 떠나 도시에 집중되었다. 책에서는 이 시기의 주거변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유주의경제 논리를 기반으로 한 산업화는 생산 단가의 최소화, 이윤의 최대화를 추구했다. 노동 분화, 생산수단의 집적, 자본의 공동출자와 제휴, 노동력 착취(예를 들어 1일 노동 12~14시간)가 일반화됐고, 서민층의 삶과 주거 조건에 막대한 충격을 줬다. 농촌인구가 도시의 산업 지구로 몰리면서 노동자 계층 전반이 주택난을 겪기 시작했다. 당시 노동자 가정은 빈민굴, 허름한 셋방, 고미다락, 동굴 등 아무 데나 살았다.
이후로도 전쟁 등의 위험요인으로 인해 주거빈곤이라는 거대한 문제를 직면한 프랑스는 말 그대로 ‘집 없는 서민’들을 위한 정책을 펼 필요성을 체감한다. 1829년 프랑스의 사상가 샤를 푸리에는 서민층을 위한 주택 건설에 관한 거대한 구상을 세상에 내놓는다. ‘팔랑스테르’라는 공동주택 형태의 도시계획이다. 그의 이상 속에서 노동자들은 함께 모여 살며 작은 사회를 형성한다.
이 ‘사회 조합적 궁전’(팔랑스테르의 다른 명칭)은 대형 건물(주거동)로 조합원 약 1600명이 ‘팔랑쥐phalange’ 하나를 이루며 그 안에 산다. 팔랑쥐의 주거동은 중앙 건물과 나무를 심은 중정, 측면의 두 부속건물로 구성된다. 최소 3층 높이 주거동은 주택 외에 도서관, 휴게실, 증권거래소, 회의실, 호텔, 오페라극장, 교회, 법원, 학교 등 다양한 공공시설을 갖췄다.
이 주거모델의 핵심은 노동자들에게 단지 ‘잘 곳’만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좋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다양한 자연적·사회적 환경을 조성한다는 데 있다. 푸리에에 영향을 받은 후대의 정치인이나 학자들도 서민주택 혹은 사회주택을 건설하는 데 있어 공통적으로 ‘빛과 충분한 공간, 녹지를’ 제공해야 한다는 원리를 기본으로 삼았다.
이렇게 사회주택의 개념에 대해 심도 깊이 논의해 온 프랑스는 현재 주거문제를 겪지 않을까? 아니다. 프랑스도 주택난과 씨름한다. 저자는 결론에서 “이제 남은 질문은 저소득층 주택 공급이라는 사회적 의무, 사회적 연대와 뒤섞임, 효율적 재정 관리라는 목표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의 주거문제도 단순 경제논리를 벗어나 보다 넓은 관점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주거문제 해결을 위한 주택공급이 그 자체로 무의미하다는 주장이 아니다. 요는 주택을 ‘얼마나’ 공급할 것이냐는 문제만 중요한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어떤’ 주택을 공급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주거란 결국 삶이다. 주거의 질과 삶의 질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문교양 <월간 유레카> 2023년 7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