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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어 여경 Aug 24. 2022

엄마 십 년만 늦게 태어나지 그랬어

나는 죽음을 앞두고 뭘 하고 있을까?

얼마 전 엄마가 일을 하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다행히 큰 병은 아니었고, 다만 그날부터 한참 동안 몸살을 심하게 앓았는데 검사를 해보니 코로나 감염까지 겹쳤다. 코로나 속에 누군가는 자신이 젊고 건강하니 괜찮다며 사회적 거리두기나 마스크의 중요성을 간과하지만, 어떤 이는 잔인하리만치 혹독하게 앓고 지나가기도 한다. 올해 백세가 된 할머니는 여러 지병이 있으신데, 요양병원에 코로나가 퍼져 큰 위험을 겪으셨다. 지금은 다행히 괜찮아지셨다.



엄마가 아프고 나서야 다시 한번 엄마를 챙겨야겠다는 마음이 든 이 못난 딸은, 그 후 어느 날 엄마랑 카페 데이트를 하러 가는 길에 기어이 운전을 하겠다는 엄마에게 무심결에 말을 했다.


“울 엄마 십 년만 늦게 태어나지.

그러면 이렇게 귀찮게 운전 안 해도 무인자동차가 알아서 해줄 텐데……기술도 더 발달돼서 몸도 편할 테고. 요즘 세상이 참 빨리 변해. 좋아지고 있어.”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왜? 난 오히려 지금 내 인생이 너무 좋은데.

몸 건강해서 직접 운전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아. 대신 십 년 후에 내가 늙어서

운전 감각도 없고 아프면 그땐 운전을 못 해도

무인자동차가 어디든 내가 원하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 줄 거 아냐. 자식한테 부탁 안 해도 되고 얼마나 고마워.”



아……


엄마의 말을 듣고

이런 관점으로도 생각해볼 수 있겠구나

싶었다. 십 년 후면 우리 엄마도 칠십 세가 넘는다.

요즘엔 칠십 세도 건강하신 분들이 많다.

(하지만 그 전엔 엄마가 60살이 이렇게 빨리 될 거라고 언제 예상이나 해봤는가.)


세월은 빠르게 도둑처럼 우리를 덮친다.

하지만 생각하기에 따라

세월은 우리에게 ‘나이 듦에 따른 깊이 있는

생각과 마음의 여유’를 선사할 수도,

아니면 그저 패배감만 남은 채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는 ‘아쉬운 노년’을 선사할 수도 있다.



시골 근무를 하다 보면

젊은이들보다는 어르신들과 더 많이 만난다.

그래서인지 나는 노년의 삶에 대해

일찍이 또래 친구들에 비해 관심이 많았다.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와 달리

이곳은 조용하고 느리다.

여유롭다. 바다가 근처에 있어서일까,

가끔 퇴근길 석양은 애잔하고

이른 아침 떠오르는 빛은 어제에 대한

회한을 남기기도 한다.



예전엔 십 년 후를 생각하면

늘 찬란함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그래 지금 열심히 하면

십 년 후는 아주 멋진 사람이 되어있을 거야.

그런데 지금은 십 년 후를 떠올리면

찬란함 너머의 노년에 대해서도

함께 겹쳐 떠올리게 된다.

아마 주변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마주하기도 하고

결혼 메시지만큼이나 부고 메시지를 받는 횟수가

늘기도 하고

부모님의 얼굴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보면서

아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으리라.

그와 더불어 죽음이란 단어에 대해서도

두려움보다는 점점 ‘현실적’인 고민을 해보게 된다.


왜 우리는 노후준비엔 신경을 써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 노후에 도적처럼 죽음도 얼마든지 올 수 있다는

건 애써 외면하려 하는 것일까?


_



요즘 나는 이어령 작가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을 반복해서 읽고 있다. 이어령 작가가 암 투병을 하는 그 마지막 여러 날 가운데 저자와 인터뷰를 한 일종의 대담집이다.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이 문장이 책의 핵심이라고 저자는 말했다.



사실 나는 죽음을 모른다.

겪어보지 않았으니 아마 죽을 때까지 알 수도 느낄 수도 없을 거다. 하지만 사람이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른 이들이 글을 통해 전한 삶의 이야기를 간접 경험하여 그 속에서 지혜를 얻기 위함이 아닌가. 아파보고 죽음을 목전에 두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들은 성숙해진다. 왜일까? 왜 사람들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안다는 것과 깨달음의 차이는 하늘과 바다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클 것인데, 우리는 왜 마치 젊을 때 아는 것을 깨닫고 체득했다고 착각하게 될까?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나는 죽음을 앞두고도 글을 쓰고 있을 것 같다.

매일 꾸준히 글을 쓰면서 느끼는 건,

성취의 경험보다 패배와 실패의 경험이 반복될 때,

위기의 상황 속에 있을 때,

내 안에서 더 많은 이야기가 쏟아진다는 거다.


나는 참으로 게으른 경험주의자라서

(이 두 가지가 모순되어 보이지만

나는 정말 그렇다. 원래 인생은 모순 투성이긴 하지)

평탄할 땐 글이 나오지 않는다.

무언가 도전하고 잘 안 될 때,

글로 남겨놔야지 라는 생각을 하면

그때 글이 술술 써진다.


그런 면에서 나는 앞으로도 자주

죽기 전까지 무수한 실패를 하고 살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삶을 살다가

죽을  자신의 인생이 싫지 않고 기대가 된다.



“성장이라는 주제에서 보면

승패는 절대 중요하지 않다.

실패와 패배로 인해 완벽해 보이던

나의 작은 세계가 깨어질 때,

우리는 껍질 밖의 더 크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게 된다.”

_나라면 나와 결혼할까 중, 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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