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 푸어(time poor) 그게 바로 나
24시간, 1,440분, 86,400초
내가 하룻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시간
먹고 자고 씻고 아이와 보내는 기본적인 시간을 제하고, 회사에 나와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까지 제하고 나면 나에게 남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승진을 위한 영어공부, 맞벌이 부부가 공히 느끼는 실질적 가장으로서의 가사활동(청소 빨래 요리 장보기 같은), 재테크, 자기 계발을 위한 시간, 그 밖에 취미나 휴식을 위한 시간, 자기 관리랄까 살기 위한 수단이랄까 아프니까 챙겨하게 되는 운동시간까지. 24시간 가지고 과연 다 해결할 수 있을까? 신문에서 떠드는 타임 푸어(time poor)는 바로 내가 맞다.
아침잠이 많던 내가 아침 6시 진동알람의 첫 번째 '지잉' 소리에 번쩍 눈을 떠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다니. 고3 때도 단번에 일어난 적 없던 나인데 이럴 때 아이를 낳고 나를 둘러싼 온 우주가 바뀌었음을 온몸으로 느낀다. 정말로 천지가 개벽을 하긴 했나 보다. 제일 먼저 일어나 샤워를 하는 동안 아이가 잠에서 깨면 남편이 아이의 아침을 준비한다. 내 준비가 어느 정도 끝나면 남편과 바통터치 그리고 그동안 내가 아이 준비를. 꽤나 손발이 잘 맞는 환상의 복식조라 자부하는데 문제는 '남편의 출장' 같은 부재 시에 발생한다. 아슬아슬한 외발자전거에 처음 올라탄 초보 운전수는 앞으로 가지도 방향을 틀지도 못하고, 넘어지기 직전 위태 위태 운전을 한다. 아이는 항상 예측에서 빗나가는데 특히나 내가 아이에 대해 잘 안다고 자만하는 순간 이 건방진 꼴을 못 보겠다는 듯 뒤통수를 얻어맞고 만다. 준비가 물 흐르듯 깔끔하게 끝나서 막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려는 찰나 코끝을 살짝 스치고 간 불길한 향기라던지(100% 응가), 옷을 다 입혀놨는데 벗기 시작한다던지, 일찍 나가야 하는 날은 평소보다 한 시간쯤 더 늦게 일어난다던지 하는 계획에 없는 타임 오버 상황들이 순식간에 펼쳐진다.
사실 복직을 하고 마음 편히 깊은 잠을 잔 적이 거의 없다. 아침 6시 알람에 못 일어나 지각을 할까 봐 신경을 쓰고 자는 탓에 새벽 세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 꼭 한 번은 일어나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눕는 게 버릇처럼 되어버렸다. 그 바람에 아이의 작은 뒤척임, 남편의 얕은 코골이에도 쉽게 잠에서 깨버리니 자도 잔 게 아니고 일어나면 밤새 두들겨 맞은 사람처럼 우두둑 우두둑 여기저기 욱신거린다. 얼마나 아팠으면 설마 나 몰래 이 사람이 날 때린 거 아닌가 하는 장난 어린 의심에 들 때도 있다. 바짝 긴장을 하고 정신없이 일과를 보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아이보다 먼저 잠이 든다. 내가 아이를 재우는 건지, 아이가 나를 재우는 건지. 누구 숨소리가 더 빨리 쌕쌕거리나 내기하듯 정신을 놓아버린다. 설거지 거리가 쌓인 개수대, 던져둔 장난감이 너저분한 매트, 먹다 남은 음식으로 지저분한 식탁, 건조대에서 건져 올린 개지 않은 빨랫감 같은 것들이 나를 맞이하고 있는데 모른 척 그걸 뒤로 하고 갯벌에 빠진 다리가 계속 깊이 빠지는 것처럼 침대에 댄 등을 더욱더 깊이 붙여본다. 나를 잡아끄는 잠의 세계로 한 발을 내딛는다. 깜빡 달게 졸고 나면 아이고 깜짝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하고 잠에서 깨어나지만 어느 날은 부리나케 방에서 나오기도 하고, 어느 날은 또 에라 모르겠다 하고는 믿는 구석(남편)에게 미뤄보기도 한다. 자정이 지나 거실로 나가보면 곱게 게진 빨래, 깨끗한 개수대, 바구니에 담긴 장난감, 포개어진 동화책들, 그리고 피곤에 절은 남편이 새우잠을 자는 모습 만날 수 있다. 잠든 남편을 보면 짠할 때가 많은데 그건 아마 남편이 진 무게를 나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일 거다.
작년 겨울 수북한 어른 설거지와 소독까지 해야 하는 아기 설거지를 쌓아두고 마음 편히 누워있지 못하던 시절, 식기세척기를 꼭 사고야 말겠다며 매장에 가서 직접 상담까지 받았던 남편은 그만큼 육아와 가사에 관심과 참여도가 높았기에 로봇청소기, 빨래건조기, 식기세척기가 요즘 ‘3대 필수가전’이라는 기사까지 내게 보여주며 누구보다 진지하게 우리의 가사노동 투입시간을 줄일 방안에 대해 고민했었는데 여러 가지 현실적 이유로 실현하지 못했고, 아직까지도 매일 밤 고통받고 있다. 로봇청소기는 짐이 많고 집이 비좁아 여기저기 쿵쿵 부딪치니까, 빨래건조기는 이사 갈 집에 있다고 하고, 식기세척기는 현재 그걸 놓을 만한 마땅한 자리를 못 찾았다고 하는 것이 현재까지 고통받고 있는 이유다.
많은 육아 서적에서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사 일은 최대한 아웃소싱 하라고 해서 육아휴직 동안 휴대폰으로 결정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결제하며 생활했다. 요리시간과 설거지 시간을 줄이기 위해 저녁 외식을 배달 어플로, 잘게 다지고 끓이고 휘저어야 하는 아기 이유식도 업체 이유식으로, 대형마트를 끊고 생필품 정기구독 까지는 했는데 그래도 시간은 항상 부족했다. 사실 우리의 생활과 관련된 모든 것은 숫자와 맞닿아 있고, 가사 일을 아웃 소싱한다는 것은 우리의 시간을 돈으로 물물교환 하는 것이므로 지갑을 열기 전에 항상 계산기를 두드리게 될 수밖에. 매일 나오는 와이셔츠 한 장을 다리는 시간, 젖병을 씻고 삶는 시간, 재료를 다듬고 열을 가하는 시간, 먼지를 쓸어내고 닦으며 집을 가꾸는 시간, 세탁기에서 나온 옷가지를 탈탈 털어 빨랫줄에 가지런히 널어 말리는 일 같은 것에 우리의 소중한 숫자를 끌어다 써도 될지, 그렇게 물물교환을 하고 나면 과연 나는 시간이라는 빚쟁이에게 독촉을 받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을지. 요령 없는 초보 워킹맘의 고민 깊은 밤은 더욱 깊어간다. 과연 정답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