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새로운 감기앓이
'남녀평등'이라는 게 학교 울타리 밖에선 존재하지 않으며, 이젠 사전에서나 볼 줄 알았던 '남녀차별'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걸 알았을 때,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20대 대졸(예정) 여자였던 나는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휩싸였다. 그야말로 카오스 그 자체. 매일이 쇼크, 아노미, 비교, 열등감, 자괴감, 부정, 슬픔, 분노 등 나쁜 감정 선물세트였다.
남자들과의 직장생활을 한다는 것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체급이 다른 선수가 맨 몸으로 링 위에 싸우는 불공정한 게임 같았다. 그 게임의 참가자인 나는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전 방위 비교열위였다.(사회적 언어능력, 업무능력, 상명하복 대인관계의 수긍 정도, 참을성 등 모든 면에서)
첫 직장에서의 2년은 매일이 악다구니, 고군분투였다. 가끔 화장실에서 훌쩍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나만 이렇게 힘든 게 아니라는 동질감과 안도감은 참으로 묘했다.
학업 - 취업 - 결혼이라는 과업의 문 크기는 남녀 모두 비슷할 것이다. 사회초년생의 사회생활이 녹록지 않은 것 역시 남자 여자 구분 없이 공히 같을 것이다. 다만, 한 단계씩 올라갈수록 문이 좁아진다고 느끼는 것 또한 같을까? 결혼 이후에 임신, 출산, 육아, 시월드 그리고 승진이라는 이름의 직장 내 유리천장. 이 관문을 통하는 문의 크기는 고민해 볼 문제이다.
나는 노력하면 그들과 같아질 줄 알았다. 사실 노력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비슷한 퀄리티로 성장하긴 한다.
여자가 시월드에 입성하기 전까지…….
페미니스트적 발언이 아니냐고 비난할지 모르겠지만, 시월드라는 대명사로 표현했지만 결혼과 동시에 후속적으로 따라오는 여러 가지의 것들이 남녀를 평등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임은 틀림없다.
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는 다른 회사들과 달리 어느 정도 업무를 순환해서 부서이동을 할 수 있다. 이를 FA 시장처럼 생각하기도 하는데, 내가 옮길 부서를 직접 섭외해야 하고 기존 내 자리에 올 후임을 직접 물색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고백하자면 나도 이번 FA 시장이 열리면 한번 참여해 보려 하는데, 이 또한 만만치 않다. 전에도 말하지 않았던 가,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결혼한 지 2년이 지난 이 시점에 새로운 부서에서 가임기 여성인 나를 새로운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 부서에서도 굉장한 모험일 것이다. 내가 언제 출산휴가, 육아휴직에 들어갈지 모르니 말이다.
때때로 예고 없이 생기기는 회식은 가임기 여성인 나에게는 특히나 부담스러운 자리이다. 아기가 언제 생길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싱글처럼 술을 퍼 마실 수도, 그렇다고 매번 뺄 수만도 없는 나름 진퇴양난의 상황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비록 바람직한 문화는 아니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연스레 회식자리에서 어필할 수 있는 기회는 없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아기가 생기지 않는 게 무작정 좋은 것만은 아니다.
아기를 갖지 않는 것은 며느리로서 철딱서니 또는 근무태만으로 찍힐 수 있기 때문이다. 과장 조금 보태서 내가 아기 낳으려고 결혼했나 하는 생각까지 든다 .
나는 아직 임신, 출산, 육아는 경험하지 못했지만 결혼을 하고 보니, '아줌마'라는 단어가 내포(모성으로 대표되는)하는 그 부정적 느낌의 것들을 왜 여자 선배들이 가지게 되었는지, 그것이 무조건 나쁘다고 비난할 수만은 없는지도 이제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나는 시월드 입성을 분기점으로 삼았지만, 선배들은 출산 시점을 분기점으로 삼더라.)
대한민국 땅의 모든 기혼 여성의 임신-출산-육아 부담(함께 등장하는 연관 검색어 '시월드'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시월드는 차치하더라도), 이게 다 여자 책임이고 여자만의 문제인가? 심지어 임신이 안 되어도 여자가 시댁에 눈치를 봐야 하는 이 희한한 상황에 대해서는 말하면 입 아프다.
앞서 말했듯이 '육체적 차이'로 인해 '임신과 출산'은 여자의 몫이지만, 그 이후엔?
그 육체적 차이로 인한 여성 노동자의 업무공백과 대체인력 수급 문제, 희망 시 복귀 가능 여부까지 걱정해가며 일 하려고 열심히 공부하고, 시험 보고, 취업하고 결혼한 것일까? 이런 생각이 들 때면 키워주신 친정 부모에게 이유 없이 미안해진다.
요즘은 육아 휴직하는 남자들도 조금씩 늘어나고는 있다지만 아직은 소수에 불과하며,
예전의 여자 선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현재의 남자들이 육아휴직을 했을 때 받을 직장 내 인사 불이익을 간과할 수 없는 노릇이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내 남편에게 육아휴직 의사를 물어본 적이 있다. 대답은 'NO'. 한집에 사는 남자도 이런데 사회에 기대한다는 것은 아직까진 무리인 걸까?
환절기마다 감기를 달고 사는 온실 속의 화초인 나는 온실(학교) 밖을 나온 순간부터 매 관문이 환절기였고, 그 관문을 통화할 때마다 번번이 감기를 앓았다. 내성일 생길 법도 하건만, 바이러스도 매년 진화를 하는지 쉽사리 적응이 되지 않는다.
아이들도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하면 감기를 달고 산다고 한다. 이 아이들의 온실은 집이고, 집 밖에서 처음으로 맞는 사회생활에 아이들도 힘이 들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인다.
그 아이들보다 서른 살 넘게 많지만 아직도 정신적 영아기에 머물러 있는 건지, 매 관문마다 몸살을 앓는 변명을 이렇게나마 해본다.
리허설 없이 진행되는 생방송이 우리 인생이라면, 그래! 예방주사 없이 맨 몸으로 이 겨울을 부딪혀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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