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03. 여기가 인력시장이야?

Pick me! Pick me! Pick me up!

리테인(retain)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가로축은 시간, 세로축은 사번 순으로 정렬된 표로 누가 어떤 프로젝트를 맡을지 스케줄을 공지한다. 할당된 스케줄을 어사인(assign)이라고 하고, 이 어사인 표가 얼마나 빨리 가득 차는지가 인기 있는 스텝(staff)의 척도라고 생각해도 좋다. 각 프로젝트의 매니저는 인기 있는 스텝을 빨리 선점해야 다른 고객사(client)에 빼앗기지 않는다.


입사 초 나는 팀 동기들 중에 가장 여유로운 어사인을 가지고 있었다. 이름만 들으면 아는 크고 화려한 대기업은 남자 동기들에게 먼저 돌아갔고, 결국엔 내 몫으로 할당된다 하더라도 가장 늦게 어사인 되는 편이었다. 언젠가는 사무실에서 꽤나 고성이 오고 갔는데, ‘된다. 안 된다.’ 다투는듯한 소리가 났다. ‘이 날짜에 이 스텝을 빼가겠다. 그건 안 된다.’ 뭐 그런 얘기였는데,  솔직히 새벽녘 드럼통 난롯불에 손만 안 쬐었지 인력시장이 따로 없었다.


가끔은 떠돌이나 장돌뱅이 같다는 생각도 했다. 양복(정장)만 입었다 뿐이지, 노트북 가방 하나 손에 들고서 전국 어디든 (혼자라도) 돌아다니는 생활. 일도 피곤하고 잠자리도 낯선 생활. 드라마 주인공의 지방 출장은 항상 당일치 기였거나, 그 숙소가 호텔이 아니었을까. 현실에서의 나는 예산에 맞는 모텔 방을 전전하는 처지였다.


(다 컸다고 볼 수도 있지만)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스물다섯 살짜리 사회 초년생에게 지방에 위치한 고객사에 혼자 1박 2일 출장을 다녀오라고 그것도 바로 전날 통보하다니. 상당히 부담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일 할 사람이 그렇게도 없었을까 원망마저 들었었다.



회계감사본부에서 회계사들이 주로 하는 일은 여러 가지 감사절차를 수행하고 그 내용을 조서로 남기고, 최종적으로 감사보고서를 발행하는 것이다. 가끔 현장에 나가서 하는 자산실사는 그중에서 흥미로운 일 중 하나였다. 회계기간 종료일 전후로 각 고객사의 자산이 제대로 있는지 살피는 일인데, 회계사는 입회자로 회사 측 담당자와 동행한다. 대부분의 회사들은 12월 31일에 회계기간이 종료되기 때문에 추울 때 실사가 많이 몰려있고, 업종마다 보유하는 자산이 다르기 때문에 특히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1.

한 번은 호텔의 냉동 창고에 들어가서 육류 등 식재료를 확인한 적이 있었다. 두터운 파카를 입고 털 부츠를 신고 추위에 무장은 했으나, 복병은 볼펜이 얼어 종이에 메모를 할 수가 없게 된 것. 다행히 같이 간 선배가 샤프를 준비해와서 무사히 해결했다. 이래서 짬이 중요한가 보다. 


#2.

언젠가는 반도체 회사의 공장에 방문했다. 방진복을 입고 방진지를 들고 에어샤워까지 마친 후 뉴스나 애국가에서 볼법한 신기한 fab이라 곳에 들어가 실사했다.  동그란 반도체와 그것을 만드는 기계들을 실사를 하는 것이다. 난생처음 방진복을 입는 거여서 입는 법을 몰라 탈의실에서 헤매고 있었는데, 청소하시는 어머님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아가씨 신입이구나? 이건 이렇게 입는 거야~” 하며 입는 걸 도와주셨던 기억이 난다. 신입 맞긴 맞지 뭐.


#3.

의류회사에 실사를 나갔던 일도 기억에 남는다. 낮에는 그 회사의 물류창고에 가서 확인을 하고, 저녁에는 서울 모처의 백화점으로 실사하는 일정이었는데, 영업시간이 끝난 백화점 매장에서 실사하는 일(예쁜 옷을 구경하는 일)은 마냥 신기했다. 자산 리스트에서 가격이 높은 물건들을 샘플링해서 눈 호강으로 사심을 채우기도 했다. 그 당시 내 초봉은 (나의) 생각보다 꽤 작았는데(회계사 수습기간 2년간은 월급이 박하다), 한 달 월급 꼬박 모아도 저 가방 하나를 못 사는구나, 저 얇은 원단으로 된 홈드레스가 내 몇 달치 월급이구나 하는 짧은 자괴감이 들었다. 회사만 들어가면 돈이 차곡차곡 모여서 금방 부자가 되는 줄 알았는데 괴리가 꽤나 컸다.




일당을 받고 일하지는 않지만 수행한 업무에 대해 하루단위로 제출해야 하는 타임 리포트는 매 시간별로 나를 돌아보게 했으며, 시급제 노동력을 생산하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일깨워 주었다. 고객사로 출근을 하지 않고 사무실(회계법인)로 출근하는 날은 좀 애매해지는데, 입력할 프로젝트 코드가 없을 때에는 Available(유휴)이 아닌 Administration(잡무)을 클릭하는 편을 택했다. 사실 Available과 Administration의 경계는 좀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Available로 클릭을 하면 나 스스로 월급도둑임을 자처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기에.


내일 당장 어디로 팔려나갈지 모르는 봇짐장수, 사무실에 복귀해서도 '메뚜기'를 뛰거나 '회의실 가두리'를 당하는 신세였지만 스스로는 월급도둑이 아닌 떳떳한 일개미이고 싶었다.


#용산일개미 #신입회계사 #신입사원 #직장인라이프 #일개미의고해성사 #진로고민 #직장인라이프 


일개미의일상 + 여의섬라이프 + 현실적인로매스 + 대식녀의고해성사 + 만들어볼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02. 온실 속 화초, 환절기 감기 걸리 듯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