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차이, 하늘과 땅 차이
알에서 부화된 새끼오리들이 처음 만나는 움직이는 물체를 제 어미로 알고 한 줄로 늘어서서 따라가는 행동을 ‘각인(刻印)이 된다’고 하는데, 이제 막 입사한 신입사원은 알에서 부화된 새끼오리 같은 처지로 이 천둥벌거숭이를 인간으로 만들어 줄 은인 같은 분이 바로 1년 차 선배 되겠다.
속된 말로 ‘짬’으로 표현되는 이 1년 차이는 어마어마한 차이인데 총무부에서 사무용품 받아오는 법, 사내 업무 포탈 사용법, 메일 쓰는 법, 타임 리포트 쓰는 법, 야근 택시영수증 청구하는 법, 휴대폰 비용 청구하는 법, 조서 파일 철하는 방법 등 이 외에도 너무나 당연하고 구차해서 설명하지 않고 지나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이 분께서 도제식으로 전수해 준다.
입사 후 몇 일간은 정말 새끼오리가 된 것처럼 이 선배만 쭉 따라다녔던 것 같다. 각 자리를 돌며 인사를 할 때도, 회사에 총무부는 어디에 있는지, 조서 창고는 어디에 있는지, 회사 내에서 우편발송은 어떻게 하는지 알려줄 때도 선배 뒤만 졸졸 쫓아다녔다.
회계사 채용 과정은 일반 기업과 조금 다른데, 우선 입사원서는 인터넷으로 접수(여기까지는 일반 채용과 비슷)하고, 이후로는 (비) 공식 적으로 학교별로 면접을 본다.
대게는 소위 SKY라 부르는 학교 출신 지원자들부터 다른 학교들 순으로 면접을 진행한다. 해당 학교 출신 파트너(지분 참여 회계사)의 수가 신규 채용 회계사의 학교별 T/O(정원) 규모를 결정한다.
면접 전형은 회계사 최종(2차) 시험 결과가 나오기 전에 치러지기 때문에 면접을 잘 보더라도 회계사 2차 시험 결과가 불합격이면 그 채용도 당연히 불합격. 이렇게 시험 결과에 따라 정원이 미달이 되면 면접에서 차순위였던 인원 중 회계사 2차 시험 합격자들이 채용이 되기도 한다.
채용이 결정되면 졸업예정자 또는 졸업자는 10월에 입사하게 되고, 학교를 다니는 사람들은 12월에 입사를 한다. 이마저도 사정이 안 되는(최소 3학년 정도에 시험에 합격한) 이들은 겨울방학 때만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고, 봄학기 이후 복직 여부를 결정한다.(일부는 다른 회사로 옮기기도 한다.)
당시 나는 하루라도 빨리 일 하고 싶었다. 학교는 한 학기가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출석을 하는 대신 출근을 택했다. 지금 선택하라고 하면 절대 이 같은 결정은 안 할 텐데, 그때의 나는 정말이지 취직이 하고 싶었보다.
마음의 준비는 되어있지 않은 채 의욕만 앞섰던 나는 정말 새끼오리였는데, 감정의 완급 조절이 안 돼서 항상 극 조증 상태로 지냈고, 리액션이 큰 편이었다. 학교와 회사에서 갖추어야 할 애티튜드가 다르다는 것도 잘 깨닫지 못했던 것 시기였다. 오죽했으면 클라이언트 중 한 분이 어느 날 내가 외국에서 학교 나온 유학파냐 물어보셨단다. 내 리액션이 그렇게도 발랄했었나? ㅎㅎ
나의 엄마 오리는 모자란 중생들이 실수하거나 어려움에 처하면 적극 나서서 많이 커버해주었다. 이제와 후배를 받아보니 모른 척할 수 있었고 그랬다면 본인 한 몸 편안했을 것인데, 그러지 않았던 선배를 생각하니 고맙고, 또 고맙다. 살갑고 고마운 선배를 만났던 건 참 운이 좋았다.
이 선배를 보면서 참는 법, 참는 법, 참는 법을 배웠다.
첫째, 감정을 참는 법
둘째, 피곤해도 피곤하다 표현하지 않고 참는 법
셋째, 상사에게 싫은 내색하지 않고 참는 법 등 참 다양하게 배웠다.
실전에서는 부질없게도 거의 다 표현했던 것 같지만.
모든 회사들이 비슷하겠지만 회계사는 연차별 업무들이 대략 정해져 있는데, 작년에 선배들이 작성했던 조서를 주로 참고하게 되므로 참고서 역할도 한다. (선배들이 작년에 삽질한 건 비밀로 가슴속에 묻어두자.)
작년에 선배들이 했던 값진 삽질(야근과 시행착오)이 올해 나의 삽질을 줄이므로 아주 중요한 길잡이이기도 한 것이다.
서류(말 그대로 실물 '종이')에 볼펜으로 어떻게 표시해야 하는지(공부할 때 책에서 배우긴 했지만 실제로 이 틱 마크(tick mark)를 어떻게 표시하는지), 볼펜은 무슨 색을 쓰는지와 같은 아주 사소한 것도 막막하고 막연하기만 했다. 학교에서 책에 필기하는 것과 달리 회사 문서에 펜을 갖다 대는 행위는 몹시 떨리는 일이었다. 실수하면 어쩌지? 볼펜으로 적었다가 틀리면 어쩌지? 샤프로 쓸까? 오만 소심한 생각을 거듭했었다.
'백문이불여일견'. 이럴 때는 조서 창고로 달려가 전기 조서를 열람하는 것이 답. 1분이면 해결.
나름 이 구역의 천사로 불려도 괜찮을 법한 선배들만 있었던 건 아니다. 엄연히 연차별로 업무분장이 있음에도 본인의 일을 몇 년씩이나 아래로 내리는 사람들이 이 구역에도 존재했다. 술을 마시면 막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갑자기 전화해서 법인카드로 식사한 내용(어디서 누구랑 먹었는지 멤버 이름)을 대라며 따져 묻는 사람도 있었고, 강남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한테 지금 당장 용산 오피스로 들어와서 이사님 리뷰에 직접 답변하라는 중간 관리자도 있었다.
푸념을 늘어놓자면 끝도 없지만, 이 어미 오리들 덕분에 내가 미운 오리 새끼가 되지 않고, 사회에 발 붙이며 살 수 있었으니 은인이 매 순간 많이도 있었다. 준거집단이 달라진 지금까지 연락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여러 인연들이 나를 월급쟁이 일개미로 잘 살 수 있게 키워준 것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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