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망하지 않았다
“선생님,
진짜 이상한 말처럼 들릴지도 몰라요. 그런데...
밤마다 누가 와요. 처음엔 정말 멋졌어요.
연예인처럼 생긴 남자였거든요.
근데 점점... 그게 아니었어요.”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눈을 감았다.
나는 조용히 그녀가 말을 이어갈 수 있도록 기다렸다.
“처음엔 꿈인가 싶었는데,
몸이 안 움직였고, 소리도 안 나왔어요.
그런데 그게... 점점 더 자주,
그리고... 낮에도 오기 시작했어요.”
그게 누구인가요? 남자친구?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니요, 사람이 아니고, 귀신이에요?"
나는 살짝 놀랐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가 계속 말하기를 기다렸다.
30대 중반의 여성.
겉보기엔 조용하고 성실해 보이는 그녀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이상하죠?
그런데 더 이상한 건...
나중에는 제가 그 귀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그 느낌이 너무 좋았거든요.
사람하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그런 황홀감이었어요.
내가, 미친 건가 보다, 생각도 해봤어요...”
그녀는 자책까지 하고 있었다.
귀접.
누군가는 미신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정신과적 현상이라 진단한다.
하지만 상담자로서 내가 마주한 건
정신도, 몸도 모두 탈진한 한 사람의 깊은 외로움이었다.
“가서 굿하래요. 부적도 너무 비싸요.
"그렇군요. 그럴 수 있죠. 토속신앙 쪽에서는.."
"저도 그쪽을 무시할 수 없다는 걸 압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음~~
저희 어머니가 하시는 걸 봤어요.!
팥의 향이 온 집안에 풍기도록 끓이셨어요
그 팥물을 마시기도 하고, 방구석구석 조금씩 뿌리시더라고요.
팥도 조금씩 놓아두시고,
그리하면 귀신이 집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던 귀신도 나간다 하더라고요.
옛 조상님들이 그렇게 해오셨다고,
그렇게 한번 해보시겠어요?
그리고 며칠 후,
저... 팥을 사서 방구석마다 두고,
매일 팥물을 끓여요. 선생님이 알려주신 거니까 믿고 있어요.
그래서인지 그 후로는 안 보이는 거 같아요. 여전히 한쪽 마음에서는 그 귀신을 기다리기도 하지만,
좋지 않다는 걸 알기에 이겨내고 있습니다."
그녀가 말한 ‘팥’은 내가 전한 작은 제안이었다.
“어떤 방식이든,
당신이 주체적으로 '나는 지킬 수 있어'라고 믿을 수 있다면,
그건 진짜 힘이 돼요.
그 믿음이, 귀신보다 더 강할 수 있거든요."
그녀의 내면에는
상처받은 어린 자아가 숨어 있었다.
오래전부터 외롭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자신을 미워하는 마음이 켜켜이 쌓인 흔적.
“그 일이 반복되면서
나는 점점 내가 사라지는 느낌이었어요.
그 사람이 오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 같고...”
나는 조용히 말해주었다.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당신이 약해서 그런 것도 아니에요.
지금까지 얼마나 혼자 버텼는지 알아요.
그리고 이제는,
그 밤의 그림자에게서 당신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에요.”
그녀는 지금,
하루에 한 번씩 직접 끓인 팥물을 천천히 마시며,
자신을 지키는 의식을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다.
그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두려움을 밀어내는 힘’이자
‘나를 회복시키는 주문’이 되기를 바란다.
혹시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공포나 반복되는 환상 속에 있다면,
먼저 말해주세요.
"괜찮다고."
"혼자서도 나를 지킬 수 있다고."
당신이 아직 망가지지 않았음을,
그리고 당신은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