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왜 쓰레기를 끊어내지 못했을까 !

by 정혜영


(상담실 기록)

그녀는 왜 쓰레기를 끊어내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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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용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단정한 정장 차림이었지만, 눈가에 잔뜩 맺힌 상처의 기운을 숨기지 못하는 중년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지난 4년간 자신을 갉아먹은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내담자의 고백 (H의 기록)


재혼을 생각하고 결정사 대신 결혼 앱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한 달 반 동안은 거의 매일 통화만 했어요. 그 사람이 아팠거든요.

저는 우리가 이미 꽤 친밀하고 진지한 관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제 이상형 그 자체였고요.

키도크고. 얼굴도 괜찮고, 똑똑하고. 부티나는 외모를 가졌어요.

화술도 좋았구요. 그와 이야기를 하면

즐거웠어요.


"첫 만남에요, 너무 좋아서 제가 먼저 스킨십을 했어요.

그리고 두 번째 만났을 때, 잠자리를 가졌습니다.

곧 결혼할 사이가 될 테니 괜찮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했어요."


저는 사랑에 눈이 멀어 너무 빠르게 깊어졌죠.

사실, 잠자리를 가진 그날 밤부터 느낌이 싸했어요.

이유 없이 불안하고, 왠지 모를 불길한 기분이 들었지만,

'다시 올게'라는 그의 말을 믿고 싶었습니다.

그가 저를 집에 데려다주는 순간까지도, 모든 것이 순조롭다고 믿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연락이 두절되었죠. 카톡이미지가 하애져있더군요. 너무 놀랐어요. 이게 무슨 일이지!!

톡 전화, 문자, 모든 연락이 차단되었습니다.


"너무 황당했어요. 제가 이것밖에 안 되는 여자였나.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충격에 그날 머리를 잘랐어요.

그해가 12월이었습니다." 충격에서 일어나려 많이 노력했죠.



그렇게 차단당한 지 40여 일이 흘렀습니다.

저는 거의 그 사람을 잊었어요.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제 일도 열심히 하고 다른 분 소개도 받고 있었죠.

그런데 그날, 다른 분을 소개받는 그 자리에서 톡이 온 겁니다.

차단했던 그에게서. 이 무슨.

더 시간을 보내자는 소개남을 두고 집으로 갔어요.

연락하고 싶었거든요. 그때 왜그랬는지 묻고도 싶었꼬..

"생각이 나서 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너무 열이 받아서 막 쏟아냈죠.

그동안 당했던 모욕감, 황당함을 숨기지 않고 퍼부었어요.

그가 화가 났는지, 그다음은 조용하더라고요." 그리고 한동안 연락이 없었어요.

하지만 이내 연락이 다시 이어졌고, 저는 분노하면서도 다시 만난 날을 기다렸어요.

하지만 이내 연락이 다시 이어졌고 행사에 온단더니. 오지않았어요.

무엇을 기대한건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왜 그랬을까요. '역시 날 잊지 못했구나,' 하는 헛된 희망 때문이었겠죠.! 완전 바보죠.


이듬해 4월, 우리는 어찌어찌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패턴은 반복됐습니다.

'다시 온다더니 연락 두절.' 주변에서 걱정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 이 만남을 숨기기 시작했습니다.

더 챙피한거 저는 그에게 돈을 바란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1억을 투자하네 마네. 그런이야기를 하데요.

믿지 않았어요. 그 말은, 허풍쟁이 인걸 그때 알았죠.

그러다 눈이 실명 위기에 처하는 일이 생겼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에게 카톡을 보냈습니다.

다음날, 그는 먹을 것을 잔뜩 사 들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쓰레기인 걸 알면서도, 아픈 나를 위로해 주는 그 모습에

저는 또다시 흔들려 그를 믿고 집에 초대했습니다.

그의 직업은 백수였고, 집안이 좋다는 짐작만 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가 굉장히 아팠어요.

암 투병을 했었고, 당뇨도 심하고, 신장도 하나밖에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어요. 아픈 사람이니까, 이해해야지 했어요.

쓰레기 같은 행동을 해도 '이 사람은 아프니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잘해줘야지'라는 마음이 생겼죠.

신장이 필요하면 제 신장도 줄 수 있을 정도로 생각했어요.

이 사람에게 저는 뭐든지 다 해 주고 싶었거든요.


그 후, 연락은 자주 되었고, 저는 그에게 의지하며 한 해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들은 저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결혼은 안 한다고요.

그러더니 자기 아는 형을 소개시켜줄 테니 그 형이랑 결혼하래요.

친구를 사귀래요.

저를 그냥 '엔조이'로 생각한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4년이 흐르도록 저는 그에 대해 아는 게 없었습니다.

직업은 은퇴한 백수, 집은 용산 어디쯤일 뿐. 유부남일 거라는 의심이 컸지만,

저는 이 관계를 놓지 못했습니다.

서로에게 욕설까지 퍼붓고 싸우면서도, 저는 이 비정상적인 끈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번에 제가 심한 말을 하고, 한 달 후 사과하려고 연락했을 때,

그는 단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나 여자친구 생겼어. 그만 연락하자."

그리고 전화고 톡이고, 말할 틈도 없이 저를 차단했습니다.

사과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어요.


"저는... 그저 잘 만나보라고 응원이라도 해주고 싶었는데.

그냥 차단당하니 또 황당한 거죠.

제가 이 나이에 뭘 믿고 이 남자를 4년이나 기다린 걸까요?

그 남자, 개 쓰레기 맞죠?"



상담사의 통찰 (나의 기록)


나는 펜을 들어 상담 노트에 몇 가지 키워드를 적었다.

비정상적인 관계 패턴,

신원 불명,

투사된 환상.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이상형'과 '선택받을 자격'에 대한 집착.


나: "H님. 그 남자는 당신이 거의 잊었다고 생각했을 때, 가장 취약한 순간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다른 사람을 만나려는 당신의 새로운 시작을 감지하고,

당신을 통제하려는 본능으로 연락한 겁니다.

당신이 그에게 '열이 받아 쏟아냈을 때' 그는 조용했죠.

왜냐하면, 당신의 분노가 곧 당신이 그를 잊지 못했다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나: "당신은 완벽한 이상형이라고 생각하는 그에게서

'소설속에나 나오는 환상의 사랑을 생각했던거에요.

현실과 환상은 다르다는 것쯤은 알 나이시겠지만, 환상속에서. 관계를 꿈꾸는 사람도 있습니다..



H:저도 다시 사랑받을 수 있다'는 확인을 받고 싶었습니다. 단지 그것뿐입니다.



하지만 그가 당신에게 돌아올 때마다 당신은 '희망'을 얻은 것이 아니라, '

그의 통제 아래 놓였다'는 굴레만 썼던 겁니다.

그 희망 고문이 4년간 당신의 자존감을 갉아먹은 겁니다."

나는 티슈를 건네주고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나: "H님. 그 남자가 당신을 차단한 것은 그의 마지막 이기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당신은 버림받은 것이 아닙니다.

당신 스스로가 4년 동안 쓰레기 같은 관계를 붙잡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제 그 사실을 인정하고, 그 끈을 놓을 때입니다."


나: "다음 시간까지, 그 남자가 당신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생각하지 말고,'

그를 만나는 4년 동안 H님 스스로가 잃은 것들을 세 가지 적어 오세요.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감정,

잃어버린 기회,

무엇이든 좋습니다.

그리고 그 잃어버린 것들을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을지 생각해 보세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상담실을 나섰다.

그녀의 인생은 아직 망하지 않았다.

이제 스스로의 가치를 외부가 아닌 내면에서 찾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시작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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