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성과, 사라지는 내 전문성에 대한 불안

<직장인의 심리노트 #13 | 관리자 Part 3>

by 여의도겨울바람

관리자가 되고 나서 문득 찾아오는 감정이 있다.

업무량이 많아서도 아니고, 인간관계에 지쳐서도 아니다.

바로 내 전문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실존적인 불안이다.

어느 날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내가 가진 무기들이 녹슬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 관리자는 심리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실무자 시절의 하루는 명확한 결과물로 증명되었다.

숫자를 분석하고, 디자인을 하고, 보고서를 만드는 등

내 손으로 직접 만든 것들이 곧 나의 성과였다.

그 결과물들은 곧 나의 실력이자, 나의 가치를 증명하는 포트폴리오였다.


하지만 관리자의 하루는 다르게 흘러간다.

회의를 오가며 의견을 조율하고,

유관부서들과 협의하며 방향을 맞추고,,

후배의 보고서를 검토하다 보면 어느덧 하루가 끝난다.

분명 쉼 없이 바쁘게 일했는데,

정작 내가 직접 만든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알 수 없는 허무함이 밀려온다.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은 전문성의 상실에 대한 불안이다.

기술과 트렌드는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관리라는 명목하에 현장의 감각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후배들이 사용하는 최신 툴이나 용어가 생소하게 들릴 때,

혹은 예전 같으면 한 시간이면 끝냈을 실무 작업이

이제는 손에 익지 않아 버벅거릴 때 불안감은 더욱 커진다.

‘만약 내가 이 조직을 나가게 된다면, 관리자라는 직함을 떼고 나면 나한테 무엇이 남을까?’

이 질문은 생각보다 무겁게 느껴진다.


이 불안 때문에 어떤 관리자는 다시 실무를 붙잡는 경우도 많다.

후배에게 맡겨도 될 일을 굳이 직접 처리하고,

실무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내가 여전히 유능하다는 증거를 스스로에게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수록

후배들은 성장할 기회를 잃고,

정작 관리자가 챙겨야 할 방향과 균형은 흔들리게 된다.


실무적 감각이 예전만 못한 것은 실력의 퇴보라기보다,

관리자로서 집중해야 할 영역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느끼는 이 불안은

능력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전문성의 기준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실무자의 전문성이 빠르고 정확하게 결과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라면,

관리자의 전문성은 결과가 만들어질 수 있는 환경과 구조를 설계하는 능력이다.

엑셀 수식을 더 빨리 짜고, 파워포인트 보고서를 예쁘게 만드는 능력은 비록 줄어들겠지만,

전체 프로세스를 바라보고, 문제점을 찾고, 해결 방법을 찾는 능력이 대신 쌓여간다.

눈에 보이는 성과는 줄어든 것처럼 느껴지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를 만드는 실력이 그 자리를 채워가고 있는 것이다.


여러 조직들과 회의를 거치고 돌아오면,

하루 종일 생산성 없는 일만 한 것만 같아 지치고 허탈할 때가 많다.

하지만 조직이 커질수록 더 값어치를 가지는 능력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해 하나의 방향으로 모으는 힘이다.

이는 단순히 말을 잘하는 수준이 아니라,

조직의 생리를 이해하고 사람의 심리를 읽어내며 최적의 합의점을 찾아내는 역량이다.

실무자 시절에는 가지기 어려운, 관리자 역할을 해본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귀한 자산이다.


실무적 전문성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불안은

역설적으로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나무 한 그루의 상태에 일희일비하던 시선을 거두어,

숲 전체의 생태계를 살피는 능력을 갖추어 가고 있는 셈이다.

나는 직접 완성하는 사람이 아니라

완성될 수 있도록 만드는 사람으로 역할이 바뀌고 있다.

그 전환을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한때 실무로 인정받았던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관리자의 커리어는

‘내가 무엇을 해냈는가?’에서

‘무엇이 가능해지도록 만들었는가?’로 질문이 이동하는 과정이다.

그 사이에서 느끼는 불안은 자연스럽다.

그 불안을 퇴보의 신호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실무자의 근육이 빠지는 대신, 그 자리에 관리자로서의 골격이 세워지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전문성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 크고 단단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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