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멀리 가지는 말자

여기가 따뜻하잖아

by 여미
누나, 나 잠깐 연기를 내려놓으려고.



3년 전, 우리는 감독 지망생과 배우 지망생으로 만났다.

서로가 아무 경력도, 습작도 없던 시절에 한 동기의 추진력으로 영화그룹스터디라는 것을 하게 되었는데 그 모임에서 알게 된 동생들이다. 서로 학교는 달랐지만, 가까운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자주 모일 수 있었다. 그때 내 나이는 스물여섯, 동생들은 나보다 서너 살 아래였다. 제비뽑기로 각자 파트너를 정해서 짧은 영화를 찍었다. 그때 내 파트터였던 한 동생은 이후에도 내가 만드는 단편영화에 종종 출연해주곤 했다. 반짝이는 눈빛과 열정으로 촬영을 하기 전부터 나에게 캐릭터에 대한 연구 노트를 보내왔다.


누나, 왠지 은찬이는(극중 배역 이름) 주변에 친구들은 많이 없을 것 같아. 겉으론 차가워보이고 눈길을 주지는 않지만 사람에 대한 관심은 항상 있어서 누가 뭘 하는지 눈여겨보곤 하는 거지. 그래서 이런 대사를 이렇게 해보면......”


한번이 아니었다. 내가 쓴 시나리오를 읽고, 극 중 배역의 행동과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우리는 자주 모여서 영화에 대한 갈망과 꿈과 사랑과 시를 이야기했다. 내가 졸업영화를 찍는 시기에 돈독하게 지냈던 배우 동생 두 명이 군대에 갔다. 그들이 제대를 하면 나는 뭘 하고 있을까, 까마득했지만 2년이라는 시간이 생각보다는 빠르게 찾아왔다. 물론 내가 이 말을 하면 이들은 “누나가 밖에 있었으니까 빠른 거야!”라고 (우린 시간이 안 가서 죽는 줄 알았다며) 호소할 테지만.


처음에는 휴가를 나올 때마다 한 달 전부터 시간을 맞춰서 만나곤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조차도 무뎌졌다. 만날 때마다 여전히 연기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 내 시나리오를 봐주거나 새로운 스토리 같은 것들을 들고 와서 그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결국에는 얼른 제대를 해서 연기판에 뛰어들고 싶다는 이야기를 내게 많이 했다.


내가 어렵게 영화를 찍고 학교를 졸업하고, 돈을 벌기 위해 사회생활을 하고 있을 때 즈음에 두 명은 비슷한 시기에 제대를 했다. 그때만 해도 어떤 영화에 출연하고 싶은지에 대한 생각들을 이야기하고, 졸업을 향한 마지막 학기를 앞두며 그들은 들뜬 마음을 갖고 있었다. 몇 달 후, 마지막 졸업연극을 끝마치고 나와 만난 자리에서의 둘은, 예전보다는 기운이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었다.


“누나, 우리가 배우가 될 수 있을지 점점 모르겠어. 이번에 연극을 하면서 여러 생각을 해봤는데, 그냥 좀 지친 것 같아.

나도 나이가 있고, 나중에 결혼을 하거나 자녀가 생기면 삶을 이어나가야 하니까.

그런데 연기는 돈이 안돼, 누나.

돈이 진짜 안돼. 일단 돈이 없으니까 뭘 못하겠어.”


나는 이들의 이런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나조차도 풀리지 않는 고민들이라는 것을 체감하고 있었다.

우리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삶을 이어나가야 한다. 그러나 예술만으로는 눈에 보이는 보상을 채울 수 없다.

배우가 직업이 되고 감독이 직업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만의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어느 정도의 재능이 있어야 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것이 지속적인 밥벌이의 수단이 되었을 때, 그때서야 직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전까지는 그저 단순한 취미이고,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별 같은 존재인 것일까.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은 모두 이렇다. 음악, 영화, 글, 배우.......

몇 마디 말보다, 아름다운 멜로디로, 스토리와 영상으로, 배우의 표정으로 모든 감정이 대체되면서 위로받는 순간을 맞이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예술을 좋아하고 그러한 매체들을 지속적으로 공유하며 찾아다닌다. 그 힘이 굉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행하는 자의 삶은 꺼져가는 불씨를 부여잡을지, 내려놓을 지에 대한 고민들로 채워진다.


나는 동생의 말에 부정할 수 없었다.

나 또한 그 길 위에 서 있으므로.

스무 명이 같은 길로 가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자연스럽게 일행인 척 뒤쫓아가지 못하는 마음.


그러면서도 이렇게 태어난 것이 운명인지, 무엇인지.

오늘도 지하철 한구석에서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노트하며

3827번째 영화를 기획만 하고 있다고 하지.

그걸 다 만들고 죽으려면 200살은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동생들과 헤어지는 골목에서 생각했다.


그래도 너무 멀리는 가지 말자.

여기가 따뜻한 거 알잖아.

멀리는 가지말자

글/그림 여미

커버사진 여미

yeoulhan@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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