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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미 Jul 10. 2017

반드시 그러하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초등학교 4학년 때, 1년 동안 내 짝꿍이었던 한 남자아이는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시험지에 100이라는 숫자를 커다랗게 적어 놓곤 했다. 본인은 어차피 100점을 맞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충만해서 적어놓은 거겠지만, 나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채점도 하기 전에 막연한 확신을 하다가 100점을 안 맞으면 큰 망신을 당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그렇게 1년 내내 모든 시험에 100점을 맞았다.


그가 자신했던 것만큼, 결과는 늘 좋았다.


‘시크릿’이라는 책이 있다. 내가 고등학생 때 굉장히 유행하던 베스트셀러였는데, 그때 당시에는 그 책의 구절들이 모두 공감이 가지 않았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이러하다. 모든 잘 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말’로 표현하면, 그것은 전 우주가 듣게 될 것이고, 우주는 당신의 소원을 들어주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무조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하고 해서, 그것을 또 말로 표현한다고 해서 현실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그저 좋게만 생각하는 것이 과연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 것일까?


스물일곱, 늦깎이 대학생인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여름 방학.


2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백수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 왠지 모르게 나는 아주 아주 긴 방학을 맞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새 학기가 시작하면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오는 것처럼, 어쩐지 나는 돌아갈 곳이 정해져 있을 것만 같은 느낌. 내가 서 있을 공간과 자리가 이미 나를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 이런 긴 공백기간이 끝나면 나는 내가 원하던 학교로 갈 수 있겠구나, 라는 막연한 기대감.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기껏해야 5명 정도를 뽑는 편입 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간단한 영화 조차 단 한편도 찍어보지 않은 나에게 영화 학과에서 나를 합격시켜준 것이다. 나는 지금 까지 내가 배운 애니메이션이 어떤 강점이 있었는지, 그것이 영화와 어떻게 연결될 것인지를 철저하게 준비해서 발표를 하였다. ‘나는 이것 아니면 안 된다’라는 생각으로 면접을 보았고, 내 의지가 이러하니 당신들은 나를 받아줘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나는 꼭 이 학교에 합격할 것이라는 믿음이 존재했었다.


그때부터 나는 나의 직감을 조금씩 믿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상상을 자꾸 하다 보면, 무언가 그것이 이루어질 수도 있겠다는 믿음. 물론 빗나간 적도 많았지만 그럴 때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잊으면 그만이다. 모든지 잘 안된 것을 부여잡고 생각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불타오르고 강렬해야 그 의지는 타인에게도 전달된다. 긍정적 확신이 주는 영향은 어느 정도 일까?


포기하는 순간 끝난 거야


최근에는 나에게 이런 일도 있었다. 영화를 촬영하다가 백만 원 상당의  촬영 장비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언제 잃어버렸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다음 장소에서 촬영을 하기 위해 장비를 꺼냈을 때 알았기 때문이다. 내 스텝들은 나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고, 나 또한 갑자기 침울해졌다. 현장에서 발생하는 사고에 대한 책임은 연출자인 내가 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꼼꼼하게 신경 쓰지 않았던 나 자신에 대해서도 화가 났기 때문이다. 몇몇 스태프가 의심이 가는 장소에 다시 장비를 찾으러 떠났지만, 좋은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었다. 애꿎은 남을 탓하기도 싫었다. 그럴수록 나 자신이 괴로워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더욱 중요한 것은 다음 장면을 위해 촬영을 계속 진행해야만 했다.


어쩔 수 없지, 우리는 오늘 촬영 잘 마무리 하자


사실 누구보다도 속상한 것은 나였다. 영화는 애니메이션보다 제작비가 어마어마하게 들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몇 편의 영화를 작업하게 되면서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좋은 배우와 함께 작업을 하고, 더 좋은 시각화를 위해서는 그만큼 투자를 해야만 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대가를 지불해야 그대로 표출이 되었다.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꿈을 위해 도전한 나에게 찾아온 이 기회는 너무나 간절하고 소중했다. 마지막 작품에 대한 애착도 남달랐기 때문에 그동안 모은 돈을 전부 투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직장 다니면서 꼬박꼬박 모은 돈과 애니메이션으로 받은 상금들은 전부 이번 작품을 위해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작품만을 위해 다른 것을 아껴가면서 제작비를 마련하였는데, 뜻하지 않은 변수가 발생한 것이다. 장비 값을 어떻게 해서든 마련한다고 하더라도, 그 돈이라면 차라리 더 가치 있는 부분에 공을 들일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때 당시는 나보다 더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스텝들을 위해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다. 그렇게 마지막 촬영까지 영화는 잘 마무리되었지만, 잃어버린 장비만 생각하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촬영이 끝나고 바로 그다음 날 새벽에 혹시나 해서 지나쳐왔던 곳곳을 다시 방문해보았지만 역시나 찾지 못했다. 누군가가 이미 고물상에 팔아버렸을지도 모르는 것이고, 우리가 모르는 곳에 그대로 고이 놓여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런 단서조차 없었기 때문에 참 막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한 스텝이 경찰서에 신고를 하고 시시 티비를 확인해보겠다며도 팔 벗고 나섰다. 사실 그럴지라도 희망은 없었지만, 신기하게도 그 순간 나에게 기분 좋은 예감이 밀려왔다. 구체적으로 어떤 장소에서 잃어버린 것도 파악이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다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아니면 다시 되찾길 간절하게 바랬던 긍정적인 마음 가짐이 발동한 것일 수도 있겠다. 다행스럽게도 장비를 빌려주었던 업체는 물건을 찾을 수 있도록 충분한 기간을 내게 주었다. 처음에 장비를 잃어버렸다고 했을 때, 배상을 하겠다고 했지만 학생이고 영화를 하는 사람들이 제작비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셔서 그런지 한번 더 확인을 해보라며 시간을 주셨다.


그렇게 되찾은 장비


과연 형사들이 젊은 청춘들이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기도 할까? 내가 직접 접촉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의 사정을 들은 생활범죄수사팀 형사들은 장비를 찾아주기 위해 굉장한 노력을 했다고 들었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모양을 설명하고, 혹시라도 본 적이 있는지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그렇게 언덕 많은 달동네를 모두 돌아다닌 결과, 기적 같은 일이 생겼다. 한집에서 우리의 장비를 보관하고 있다는 사람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꿈같은 일이었다. 어떻게 그 넓은 달동네에서 찾을 수 있었을까? 안 좋은 일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했던 나에게 주는 선물이었을까?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 나를 도와주려고 했던 한 스태프의 따뜻한 마음 가짐에서 출발하여 굉장히 협조적이었던 노원구 형사들, 그리고 장비업체의 배려 덕분에 나는 배상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었다.


물론 나에게 그날따라 운이 좋았을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내가 믿고 있는 것은, 나에게 찾아온 위기가 절대적으로 잘 풀릴 것이라는 긍정적인 믿음이 낳은 결과라는 것이다.


말하면,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글/그림 여미

커버 사진 최영미

yeoulhan@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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